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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나 봐요

서로의 물결을 헤아려보며,

by 루체

가끔 회사 동료들과 바닷가 근처에서 회식을 할 때가 있다. 서울이나 대구와 같이 바다를 끼고 있지 않은 도시 출신의 동료 분들은 유독 바다를 볼 때의 반응이 격하다. 아무래도 바다를 볼 기회가 적은 탓에 느껴지는 낭만이 다른가보다. 울산에서 나고 자랐던 나에게 바다는 낭만이라기보다는 주로 위로였다. 마냥 무조건적인 위로가 필요한 날이면, 아무런 공해 없는 한적함에 그저 머무르고 싶은 날이면 바다를 찾았다. 화사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에는 부스러지듯 화려한 윤슬을, 흐리고 우중충한 날에는 마치 나 대신 화를 내주는 것만 같은 매서운 파도를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얼마 전, 한주 내내 격무에 시달린 나에게 작은 보상을 주고 싶은 마음에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무작정 부산으로 향했다. 언제 봐도 기분 좋은 광안대교와 광안리 바다를 보며 간단한 점심을 즐기고, 인파가 적은 주중에 가보려고 메모해 두었던 어느 서점에 들러 한참을 둘러보았다. 대형서점이었던 탓인지, 아쉽게도 평범했던 큐레이팅에 큰 감흥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근처에 살고 있는 오랜 친구가 떠올랐다. 채 돌도 지나지 않은 딸의 육아로, 최근 만났던 적이 언제였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즉흥적으로 그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반갑기도 하고, 친구의 딸이 엄청 신기하기도 했다.


아빠를 쏙 빼닮은 친구의 딸은 낯도 가리지 않고 생글생글 잘 웃더니, 채 10분이나 지났을까 별안간 동남아의 스콜처럼 매섭게 울기 시작하였다. 저러다 귀가 상하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고래고래 악을 쓰듯 잠투정을 하였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아기 바로 옆에 한없이 평온한(?), 아니 초연한 얼굴을 하며 그저 아기를 바라보는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문득 친구가 입고 있던 목 늘어진 티셔츠, 꾀죄죄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에게 아기의 생떼는 그저 일상에 불과했다. “졸려 보이는데 뭐 어떻게 해줘야 되는 거 아냐?”라는 내 질문에, “뭘 해줘도 자기 울 거 다 울고 나서야 잠에 든다.” 며, 그저 기다리는 친구의 모습이 제법 안쓰러웠다. 또, 제법 어른 같았다.


문득, ‘어른다움’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스쳤다. 한때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마치 바다 위의 전망대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망망대해 떠있는 배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바다에도 언제든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것. 누구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라 기대했었다. 그 기대와는 달리, 요즈음의 내가 느끼는 어른의 모습이란 파도 끝 방파제에 더 가깝다. 크고 작은 모양의 파도를 막아서고 받아내며 땅 위의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방파제 말이다.


흔히 우리가 아는 네 개의 다리를 가진 방파제는 ‘테트라포드’라 부른다. 어쩌면 징그럽게 생겼다고 볼 수도 있는 테트라포드의 구조는, 네 개의 팔이 십자 형태로 뻗어 서로 겹쳐 쌓을 수 있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모양이라고 한다. 파도가 테트라포드에 부딪치면 에너지가 분산되어 파도의 세기가 약해진다. 비록 보기 좋은 예쁜 모양은 아닐지라도, 누구나 우러러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있지 않더라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강한 물결에도 흔들리지 않는 방파제는 내가 지향하고 추구하는 어른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먼저 나서서 알려주기보다 기다려주고 지켜봐 주는, 세상의 풍파를 앞서 견디고 가공해 주어 내 소중한 것들이 자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방파제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설령 그것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나 역할이 아니었더라도, 기꺼이 내가 처한 상황과 운명을 맞이하고 그 속에서의 쓰임에 행복해할 줄 아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바다를, 방파제를 닮은 어른들이 제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는 그 마음을 나는 오늘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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