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 우리에게 알려준 불편과 성장의 기록
'눈먼 자들의 도시'는 알 수 없는 의문의 질병으로 갑작스레 시력을 잃어간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2008년 영화로도 제작된 이 이야기는, 앞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삶과 공동체를 통해 도리어 인간의 본성, 특히 그 어두운 민낯과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병든 사회 속에서 인간은 서로를 돕기는커녕 원초적이고 야만적인 위계질서를 형성하며 본능 그 자체에 충실해져 간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경험한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그저 단순히 픽션 속 비현실적 요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팬데믹이 만든 새로운 일상
코로나19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많은 생명을 앗아갔으며 백신 부작용과 후유증은 또 다른 문제를 남겼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삶의 방식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일상 속 당연하게 누리던 관계를 강제로 끊어냈고, 신혼여행·행사·모임 등 삶의 이벤트들까지 변형시켰다.
반면, 우리가 잃은 것에 감히 비할 수는 없지만, 긍정적인 변화 또한 찾아볼 수 있다.
국가 차원의 보건·의료 시스템이 강화되었고, 국민적 인식도 크게 달라졌다. 예컨대 팬데믹 기간 전후로 인플루엔자 양성률이 0.04% 수준으로 급감했다는 통계도 있다. 또한 비대면 활동의 확산으로 원격근무, 화상회의, 온라인 수업이 보편화되었고, 이는 4차 산업혁명을 가속하는 촉매가 되기도 하였다.
마스크: 불편한 보호막, 새로운 상징
가장 사소하지만 뚜렷하게 느낀 변화 중 하나는 바로 '마스크'였을 것이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 대중교통ㆍ직장ㆍ공공시설 심지어 거리에서조차 마스크는 필수였다. 무더운 여름에도 예외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5인이상 모임은 제한되었으며, 식당을 포함한 기초생활시설은 20시, 21시경 문을 닫아야만 했기에 시간과 장소의 제약 또한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스트레스와 불안,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부담이 커졌다. 마스크는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동시에 가까운 사람들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도 하였다.
감각의 차단이 만든 변화
'눈먼 자들의 도시'가 다룬 감각은 시각이다. 시각은 우리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는 기관이다. 우리는 사물을 보고 관찰하며 필요한 정보를 습득하고 해석하여 판단한다. 대표적인 '입력' 기관이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는 시각으로부터의 정보를 폐쇄함에 따라, 직업이나 지위 등 전통적인 사회적 서열이 파괴되고 새로이 형성되는 물리적 질서를 보여준다.
한편, 마스크가 차단하는 창구는 눈이 아닌 '입'이다. 소통의 목적에서 입은 '출력' 기관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맡아보고 만져보며 얻은 정보를 해석하면 그 뜻과 의지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입력기관의 제한은 나와 세상 간의 외부관계에 변화를 야기하였다. 반면, 출력기관의 제한은 나와 내 마음, 즉 내재적 관계의 변화를 만들었다. 물은 고이면 썩기 마련이다. 밀폐된 공간에서는 호흡할 수 없다. 생각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정보들로 얻어진 생각들은 때로는 상황에 맞게, 때로는 날 것 그대로 표현되어야 한다. 허나 마스크는 그 행위를 불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시 열린 출력
팬데믹 기간이 종료되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됨에 따라 우리는 그간 억눌려왔던 욕구를 건강하게 분출했다. 골프, 오마카세, 명품 등 물질적이고 과시로 가득 찼던 인스타그램 게시물들은 어느새 러닝크루, 러닝기록, 독서모임 등 '건강'과 '모임'으로 대변되는 다소 상반된 성격의 게시물들로 변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저속노화, 웰-에이징(Well-Aging)과 같은 키워드가 떠올랐고 우리의 식습관, 생활습관은 더 건강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직장에서는 또 어떤가. 불필요한 회식이 줄고, 화상회의나 원격근무로 절약된 시간은 개인의 취미, 자기 계발에 쓸 수 있게 되었다.
삶의 순환 속 마스크의 의미
짧게 보면 팬데믹은 불편과 고통을 안겨줬지만,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우리 삶의 균형을 다시 잡아준 계기이기도 했다. 삶은 늘 순환한다. 음(-)을 겪으면 양(+)을 추구하고, 다시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음(-)에 닿는다.
가볍게 호흡을 들여다보자. 인간은 숨을 들이마시기만 해서는 살 수 없다. 날숨을 통해 이산화탄소와 같은 부산물을 뱉어야 한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하루하루도 마찬가지이다. 식사를 통해 에너지를 공급해야 하고, 불필요한 것들은 배설해야 한다. 무작정 많이 먹어서도 안된다. 적정량을 적정한 시기에 맞춰 먹어야 건강할 수 있다.
일주일은 어떠한가. 5일간 열심히 일하며 얻은 피로를 주말, 고작 이틀이지만 짧게나마 우리는 해소하는 시간을 가진다. 여유가 인간을 행복하고 안정되게 하지만 여유만으로 가득 찬 삶이 과연 행복할까.
우리의 1년 또한 사계절로 채워져 있다. 무더운 여름과 매서운 겨울은 우리를 따분하게, 경직되게 하기도 하나 결국 그 다양성이 우리의 내면과 관계를 풍성하게 한다.
오늘날 당신의 마스크는 무엇인가?
마스크는 우리에게 그 순환을 가르쳤다. 당장은 숨 막히는 불편이었지만, 그 시간을 지나며 우리는 조금 더 건강하고 성숙해졌다. 나는 우리의 삶 속 각자의 마스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학적 태도를 가지자는 것이 아니다. 당장의 짧은 인식에서는 고통을 가져오는 요소들이, 언젠가 돌아보면 우리를 성장시키는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음과 양의 순환, 그 파동의 사이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움직임을 나는 '삶의 중심'이라 여긴다. 일차원적인 '점'이 아닌, 다차원적인 '구간'. 잘 나온 '사진 한 컷'이 아닌, 수많은 상황과 모습을 담은 '영화 한 편'이 나의 프로필이다. 그 영화가 나와 타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인생영화가 되려면 '마스크'는 필수적이다.
오늘날 당신의 마스크는 무엇인가? 이 글 한 편이 당신에게 불편하지만 따뜻한 영감을 주는 작은 질문 하나를 선물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