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기 시작하여 비나 물이 되는 날
매년 연말이면 지난 겨울에 세웠던 책상 위의 To-Do List를 살펴보며, 그때와 지금의 온도가 같은지 느껴본다. 내가 세웠던 목표를 모두 달성했는지, 어떤 점이 힘들었는지, 그 과정에서 느낀 것은 무엇인지를 종합적으로 되돌아본다.
지난 2025년 1월에는 친구들과의 독서모임 간 각자의 To-Do List를 공유했다. 그리고 12월, 각자의 성과를 되돌아보았다. 그간 매년 혼자서만 해오던 일을 처음으로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해보니 성과에 대해서도 더 객관적이고 입체적인 피드백을 얻을 수 있었다. (성취도가 높든 말든 그저 즐거운 건 덤!)
지난 1월 신정 즈음에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각자 2026년 한 해의 To-Do List를 세워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를 향한 일종의 선언을 통해 혼자 다짐하는 것보다는 더욱 강한 의지를 다졌다.
야심차게 세웠던 나의 선언은 한 달이 넘도록 그저 동결되어 있다가, 얼마 전 설연휴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부적인 실행 플랜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책 읽기나 운동하기와 같은 다소 루틴한 성격의 항목들은 자연스레 진행 중이었으나, 프로젝트성이 강한 항목은 아직까지 그 계획을 구체화하지 못했었다. 5일간의 긴 설연휴 동안 다시금 리스트를 정리하고 시기별 행동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본격적인 "실행"에 들어갔다. 이렇게 구정이 되어서야 2026년이 진짜 시작되었음을 몸소 느꼈다.
새해의 시작은 1월 1일, 신정이지만 이는 선언적인 의미에 가깝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태양력을 기준으로 하여 일상을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체감하는 새해의 시작은 음력설인 구정, 명절이 되어서이다. 구정에는 며칠간의 연휴도 있어, 긴 휴식을 취하며 비로소 새로운 한 해의 시작과 변화를 체감한다. 회사에서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개시하고, 학생들은 코앞에 다가온 새로운 학기를 준비한다.
달력상 새해의 시작이 1월 1일이라면 24절기상의 시작은 '입춘'이다. 2월 3~4일 경인 입춘은 봄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흔히 인지하는 봄을 2월 초순경에 느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바로 어제 2월 19일. 2번째 절기인 '우수'가 되어서야, "2월인데 벌써 봄이 왔나? 날씨가 봄 같다." 하는 사람들의 대화가 거리에서 종종 들린다. 코끝을 빨갛게 얼리던 하얀 공기가 조금씩 초록초록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봄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체감한다.
신정이 입춘이라면 구정은 우수처럼 느껴진다.
신정에 세운 목표가 선언이었다면, 구정에 세운 계획은 실행이다.
입춘이 '말'로 시작한 절기라면, 우수는 '몸'으로 시작한 절기이다.
겨우내 꽁꽁 얼어있던 눈이 녹아 물이 되어 세상 곳곳에 흐르듯,
딱딱한 글로 담아둔 선언들을 행하고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본다.
새해는 달력 위에서 먼저 시작되지만 삶은 늘 조금 늦게 따라온다.
그렇게 나의 2026년은, 우수처럼 천천히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