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지속되는 것만으로 행복이 된다

AI시대 글쓰기 노동자의 일상기록(8)_히로시마 #3

by Lazist

여행이야기 | 히로시마 #3

천재지변(天災地變)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일어난다. 무가치의 개연성이다. 아무도 바람을 원하지 않았는데 그것들이 뭉쳐 태풍이 되고, 인명과 재산을 앗아간다. 이런 일들에는 신의 설계가 있을지는 몰라도 어떠한 의도도 없다. 그냥 일어나고, 그냥 벌어진다. 의도를 개입시키는 것은 인간이다. 태풍에는 의도가 없지만 원폭에는 의도가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록관


히로시마는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구상 단 두 개의 도시 중 하나다. 사람들은 원자폭탄이 떨어진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 시간을 세우고 기록관을 지었다. 평화가 기록되지 않은 평화기록관. 이곳은 커다란 무덤이다.


오노미치와 미야지마를 돌아 본격적인 히로시마 탐방의 출발지로 이곳을 정한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마음이 아프다. 끝. 누가 이런 일을 왜 벌였는가, 끝. 이미 몇 번이나 대멸종을 겪은 지구에서 인간은 스스로 멸종을 택한 유일한 종이 될지도 모른다. 도시의 모든 삶이 원폭을 경계로 전과 후가 나뉘는 그곳에서는 어떤 결론도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이렇게도 명확한 메시지가 또 있을까?


나는 원전(原電)에 반대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핵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에너지원이다. 사고가 벌어지면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스리마일에서 시작해 체르노빌을 거쳐 후쿠시마까지 인류는 벌써 세 번의 핵의 통제불능 상태를 경험했다. 원전 사고의 교훈은 명징하다. 일단 사고가 일어나면 그 무자비한 에너지가 다 소진될 때까지 넋 놓고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원폭은 통제가 불가능한 핵 에너지를 살상에 사용한다는 점에서 최악이다. 통제 불가능한 멸종 버튼을 스스로 만들어놓고, 어떻게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평화를 위해서 대량 살상무기가 필요하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 평화기록관이 보여주는 대부분의 전시품들은 원폭과 함께 사라진 일상의 잔해들이다. 원폭으로 삶이 멈춰버린 아이들의 교복과 교모, 그날 그들의 어머니가 싸준 철제 도시락, 그리고 피폭 이후의 삶을 기록한 끔찍한 그림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가끔 생각한다. 여행자처럼 무례한 족속들은 없다. 상상으로는 도무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 웃고, 즐기며,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평화기록관 안에서는 그런 여행자들조차 웃음을 멈춘다. 정지된 시간을 목격하고, 엄청난 폭력의 무게에 짓눌려 입을 다문다. 여러 개의 전시관을 관통하며 길게 구성돼 있는 동선 그 어디서도 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사람들은 겪어봐야 비로소 안다. 그러나 사실은 겪어봐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 비극을 생생하게 본 지 어느덧 80년 세월이 흘렀지만, 인류는 여전히 핵무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길고 무거운 기록관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원폭돔이다. 마지막 전시관을 빠져나오는 순간 커다란 창 바깥으로 원폭돔이 보인다. 그곳에 서서 원폭돔이 말을 건다. 너희들, 이래도 정신을 차리지 않을 거야?


평화기록관은 평화기념공원 안에 있다. 커다란 분향소 같은 느낌을 주는 평화의 못과 평화의 불을 지나 대각선으로 공원을 가로지르면 조선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나온다. 이 비극이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의 일이 아니었음을 일깨워주는 기념물이다. 편의점에서 미리 사서 들고 간 생수 한 병을 두고 돌아왔지만, 의미가 크지 않다. 일이 일어난 뒤에 하는 일은 대체로 거의 의미가 없다. 유일한 의미는 같은 다시 하지 않는 것인데,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같은 일을 반복할 가능성이 더 커지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히로시마 여행의 첫 비를 맞았다.


히로시마미술관


평화기록관을 거쳐 우산을 받쳐 들고 찾아간 곳은 히로시마미술관이었다. 이름에 미뤄 현립 혹은 시립 미술관 쯤으로 생각하고 갔는데 입장료 가격을 보고 놀랐다. 밖에서 보는 건물 규모가 크지 않았는데 무려 1500엔이나 했다. 들어가 보니 역시나 단층 규모의 상설 전시관이 고작 네 개 뿐이었다. 하지만 미술관의 가치는 규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서 고흐의 그림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손가락을 대고 유화물감의 질감까지 느껴볼 수 있는 거리였다. 히로시마미술관에서는 밀레와 르느와르, 샤갈, 피카소까지 모든 그림을 가까이서 마음껏 볼 수 있다.


루브르에는 모나리자가 있고, 베드로대성당에는 피에타가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을 보기 위해서라면 엽서나 화집에 담긴 사진을 보는 게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히로시마미술관에는 방탄유리도 없고 관람객도 적다. 심지어 사진촬영을 금지하지도 않는다.

나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만날 때마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질리도록 길게 그림을 쳐다봤다. 평화기록관에서 가졌던 무거운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네 개 밖에 안 되는 상설 전시관과 기획 전시관을 도는 데 그날 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썼다.


나는 피카소의 그림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1900년부터 1959년까지 여러 점의 피카소를 일렬로 늘어놓고 보여주는 미술관이 과연 세계에 몇 개나 있을까 생각했다. 히로시마미술관의 이런 압도적 컬렉션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미술관이 공립이 아니라는 데 있다. 히로시마은행이 이 미술관의 소유자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그림과 여유로운 관람여건을 생각하면 1500엔의 입장료는 오히려 싼 편이었다. 오노미치에서 이미 이번 여행의 본전을 다 뽑았다고 생각했지만, 히로시마미술관에서 아예 사골을 우려냈다.


다음 코스는 일본 도시여행의 의례적 코스인 성(城)과 정원이었다. 흩날리는 가을비를 조금 맞았다는 것 외에는 딱히 인상적인 기억이 없다. 입장료를 받는 천수각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슛케이엔(縮景園) 또한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나는 일본식 정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미니어처 같은 인공적 느낌이 지나쳐 종종 거북하다. 사람의 정성은 있어도 자연이 느껴지진 않는다.

슛케이엔을 빠르게 돌았지만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루프탑 온천이 멋졌던 호텔로 되돌아가 배낭을 찾았다. 에비스초를 지나는데 축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대나무로 된 갈쿠리를 파는 노점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쿠마데(熊手)라고 하는 복을 긁어모으는 축제 기념품이었다. 우리의 복조리와 비슷하다.


걸음을 멈추고 쿠마데 파는 풍경을 구경하고 있던 일본인에게 물었다. 이 축제는 언제까지 하나요? 퍼레이드 같은 것도 하나요? 저녁에 다시 이곳에 올 가치가 있을까요? 젊은 여자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 미련 없이 전차를 타고 니시히로시마로 향했다. 니시는 서(西)의 일본 말이다.




니시히로시마


니시히로시마의 허름한 료칸에 숙박지를 정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월요일 5000엔도 안 되는 가격이었던 루프탑 온천 호텔의 숙박비가 축제의 영향인지 화요일 정확히 세 배로 뛰었다. 경험상 이럴 때는 도심에서 벗어나는 게 좋다. 니시히로시마는 히로시마역에서 JR로 딱 두 정거장이다. 에비스초에서 전철을 타면 30분 정도가 걸린다. 평소 같으면 걸어다닐 거리지만, 창밖의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천천히 달리는 노면전차도 뚜벅이 여행자에겐 좋은 선택이다.


나는 예전에 유후인의 료칸에서 며칠을 묵은 적이 있다. 값이 싸든 비씨든 호텔보다는 확실히 료칸이 나에게 맞는다. 가정식에 가까운 밥이 맛있고, 온천욕을 하는 것, 다다미에 누워 자는 것 모두가 색다른 경험이다. 료칸의 여주인이 서툰 영어로 몇 가지를 설명했다.


우리 료칸은 방에 화장실과 욕실이 없어, 알고 왔지? 당연히 그랬다.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화장실이나 세면대에 줄을 설 만큼 숙박객이 있을 리 없을 테니까. 나는 아이 씨, 노 프라블럼이라고 대답했다. 여주인이 밝게 웃으며, 우리는 개별 욕실이 없는 대신 엄청나게 큰 욕실(very big Bath)이 있다고 설명했다. 유쾌한 사람이었다. 조식을 예약하고 싶었지만 거절당했다. 하루 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식사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일본의 료칸은 한국의 여관과 다르다. 여주인의 음식솜씨가 성패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몹시 아쉬운 일이었다.


방을 열어 배낭을 던져두고 바깥으로 나왔다. 료칸에서 아침을 해결할 수 없다면 저녁을 제대로 먹어둬야 했다. 몇 발짝 걷지 않아 식당을 발견했다. 골목이라고 불러도 좋을 작은 사거리에 면한 오래된 식당이었다. 가까이 가서 메뉴를 살펴봤다.


식당이 아니라 정육점이었다. 실내를 가로질러 길게 놓여 있는 투명한 냉장고 안에 붉은 조명이 켜 있었다. 그런데 냉장고 앞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테이블들은 대체 뭘까? 자세히 유리문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살펴봤다. 키쿠오카정육점(キクオカ精肉店)이라는데 안내문이 요상했다. 고기요리 198엔, 18시 개점.


저녁이면 타치노미야(立ち飲み屋)로 변신하는 키쿠오카정육점은 젊은 여성 둘이 운영한다. 한 명은 매니저 역할로 주문을 받고 안주를 만든다. 더 어려 보이는 쪽은 술 담당이다. 주문이 들어오면 매니저가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고, 이 아이가 술을 '만다'. 샤와, 하이볼 등등 일본의 주점에는 마는 술이 많다. 그곳에서 나는 히로시마 여행에서 가장 맛있는 생맥주를 만났다.


단품 198엔짜리 안주도 모두 훌륭했다. 첫 안주로 스테이크와 레바(생간)을 주문했다. 실수였다. 나는 생간을 즐겨먹는 타입이 아니다. 곧 얇게 저민 소고기 구이 세 점과 간장을 소스로 얹은 레바가 나왔다. 소의 내장에 대한 선입견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신선한 레바가 익숙한 스테이크보다 몇 배는 더 맛있었다.


도파민 과다분비 상태가 된 나는 본격적으로 달려보기로 했다. 1500엔 무제한 드링크를 주문했다. 항상 웃는 얼굴이었던 매니저가 5분이 경과한 상태인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친절이었다. 당연히 첫잔은 따로 계산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번역기를 켜서 “나는 상당히 빨리, 많이 마신다고. 괜찮겠어?”하고 말했더니 매니저가 푸하하, 하고 웃었다. 결국 나는 500엔의 요금으로 30분을 연장했고, 한 시간 반 동안 여러 잔의 사케와 소주를 마셨다. 눈길이 가는대로 안주를 시켰지만 총액 5000엔을 넘지 않았다. 내내 낯선 여행자를 위해 마음을 써준 매니저가 몇 개의 안주를 계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계산을 하면서 몇 번이나 되물었다. 너 확실히 계산한 거 맞아? 깎아준 거 아니야?


정육점을 나서려는데 매니저가 물었다. 어디로 가? 2차에 갈 거라고 대답했다. 다리가 안 아팠다면, 여기서 끝까지 마시는 거였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그러자 이 매니저가 갑자기 앞치마를 풀며 나에게 말했다. 팔로우 미!


그녀는 100~200m 정도 떨어져 있는 이자카야로 나를 안내했고, 그곳 주인에게 몇 마디 말을 해주고 떠났다. 엔조이 히로시마. 그녀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분명히 그녀의 이름을 물어봤을 텐데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가 추천해준 안주를 내온 새로운 술집의 주인과 몇몇의 동네사람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눴던 것만 어슴푸레 기억날 뿐이다. 블랙아웃. 히로시마의 마지막 밤의 기억이 일부 사라졌지만 아깝지는 않다. 없어진 기억이 안 아까울 만큼 질 좋은 추억이 쌓였다.


다음날 히로시마에 온 후로 가장 늦게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취가 상당했다. 한국에서는 섞어먹지 않는 술을 일본에서는 늘 섞게 된다. 공항버스는 히로시마역에서만 출발한다. 니시히로시마역에서 고작 두 정거장 거리다. 전날 노면전철에서 내릴 때는 몰랐는데 JR 니시히로시마 역전이 잘 조성돼 있었다. 사방이 유리창으로 된 여행자 쉼터 주변에 인조잔디가 깔려 있고, 간단한 음료와 음식을 파는 컨테이너 식당이 몇 개 늘어서 있다.


제일 끝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카라멜라떼를 주문했다. 나는 여행을 할 때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 아침 우유를 넣은 단 커피를 마신다. 속을 든든해진다. 한 달여의 산티아고 트래킹에서 얻은 고급 스킬이다. ‘핫 카라멜라떼 원’이라고 했을 뿐인데 카페를 지키고 있던 젊은 여자가 물어본다. 한국분이세요?

쇼코는 한국을 좋아하는 일본인이며, 한국어를 독학하는 중이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히로시마에는 한국인 여행자가 드물고 니시히로시마에는 여행객 자체가 드물다. 그런데도 어찌 한국인 여행자를 한눈에 알아봤는지 신기했다.


쇼코는 한국인과 한국말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돼서 기쁘다고 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호감을 갖고 있다거나, 한국어를 공부한다거나 하는 사람은 일본에 드물지 않다. 하지만 한국인 관광객이 흔한 동네에서는 ‘한국어로 대화해서 기쁘다’와 같은 말을 듣기가 어렵다. 나는 쇼코와 몇 마디를 더 나누고 그녀의 한국어 실력을 칭찬해줬다. 그리고 카페 앞에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나머지 카라멜 라떼를 마셨다.

빈 테이크아웃 컵을 버리기 위해 카페에 다시 들어갔을 때 쇼코가 작은 메모를 줬다. 히로시마 여행에서 얻은 두 번째 메모. 미덕의 여주인과는 달리 쇼코는 띄어쓰기를 할 줄 알았다.


좋은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히로시마를 떠나기가 싫어졌다. 정확하게는 니시히로시마를 떠나기가 싫어졌다. 진심으로 비행기 표를 연기할까 망설였다.


쇼코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기차에 올라 다음 역에서 내렸다. 요코가와라는 역이었다. 역 광장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에 들어가 우동과 오니기리를 먹었다. 쇼코의 카라멜라떼로 달래뒀던 속이 온전히 풀어졌다. 할 일 없이 역 광장에 앉아 햇볕을 쬐다가 거리를 쏘다녔다. 과일가게를 지날 때 올해의 첫 귤을 샀다. 다섯 개 정도 담긴 바구니 하나가 100엔이었다.


그리고 얼마를 더 가 1100엔 오늘의 런치라는 메뉴판을 보고 식당에 들어갔다. 나이 든 할머니 둘이 운영하는 ‘누가 봐도’ 일본 식당. 데리야키 소스를 올린 햄버그와 감자샐러드, 달걀프라이, 검은 깨를 끼얹은 고봉밥이 나왔다. 할머니 두 분에게 귤 두 개를 나눠드렸다. 기대 이상으로 기뻐하면서 일본어로 뭔가를 물어봤다.

한국인입니다. 일본어를 몰라요. 서툰 일본어로 대답했다. 얼마 후 할머니가 작은 햄버거 하나를 더 들고 왔다. 히로시마가 떠나려는 내 팔목을 자꾸 잡아끌었다.


여행을 하면서 꼭 수행하는 나만의 미션이 하나 있다.

이곳에 다시 올 이유를 만들어두는 것.

히로시마에서 그럴 만한 이유가 꽤나 여러 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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