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글쓰기 노동자의 일상기록(7)
나는 2000년대 초반에 첫 유럽여행을 갔다. 지금과는 세상이 많이 달랐다. 인터넷은 있었지만 모바일로 인터넷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요금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단말기도 마땅치 않았다. 그때까지 전화(電話)는 말 그대로 음성[話]만을 전하는 통신수단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휴대폰이 없던 시절을 상상하지 못하고, 2010년 이후 태어난 사람들은 스마트폰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 시절 나의 유럽여행을 안내한 것은 책이었다. 여정을 결정하면 현지 정보가 담긴 ‘책’부터 사는 게 당시의 프로세스였다. <세계를 간다>나 <론리플래닛> 같은 여행 안내서 시리즈가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식당에 별점을 부여하는 <미슐랭가이드(Michelin Guide)>도 원래는 여행 안내서다. 게스트하우스나 호스텔 어디에서나 다양한 언어가 적힌 여행서들이 굴러다녔다.
책으로 부족한 경우에는 숙소에 한 대쯤 있기 마련인 게스트용 데스크톱을 이용해 정보를 검색했다. ‘유랑’이라는 커뮤니티가 인기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여행 정보를 올리거나 동행을 구했다. 그렇게 인연을 쌓아 한 쌍이 된 이른바 ‘유랑커플’들도 적지 않았다. 현지의 뜨끈한 정보 제공은 게스트하우스와 호스텔, 한인민박 주인들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책보다 커뮤니티나 숙소 주인들의 정보가 더 좋았던 것은 그것이 최신의 정보였기 때문이다. 출판사 편집자들은 해마다 여행서에 새로운 내용을 채워 넣었지만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수시로 바뀌는 박물관 입장료와 유레일 노선, 운임 정보를 실시간으로 파악해 책에 수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도 내 책상머리에서는 코로나19 직전 2019년쯤에 산 <EASY 시베리아횡단열차>라는 책이 굴러다닌다. 시베리아횡단열차 탑승은 언젠가부터 내 버킷리스트 품목 중 하나인데 코로나19와 뒤이어 터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시베리아는 얼마나 변했을까?
요즘은 <세계를 간다>나 유랑, 민박집 주인의 역할을 스마트폰과 구글지도가 대신한다. 내가 여행지에 도착할 때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휴대폰을 켜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다. 비행기 안에서 미리 갈아둔 USIM이 현지 통신사에 접속해 화면에 지도를 뿌려주면, 목적지를 설정한다. 그 다음부터는 구글이 하라는 대로 몸을 움직인다. 구글이 속삭인다. 30미터 앞에서 좌회전하세요.
나는 이제 여행 전에 책을 사거나, 커뮤니티 정보를 검색하지 않는다. 구글지도를 보고, 길안내를 받으며, 거기 달려 있는 정보와 댓글을 참고해 행선지를 결정한다. 구글지도뿐 아니라 스마트폰 여기저기 여행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내가 필요로 할 때 손쉽게 볼 수 있는 곳에 놓여 있다.
블로그 자동화로 연 1억 벌기. AI 세상이 열리면서 내가 가장 많이 본 문구 중 하나다. 이들은 제안한다. 자동화 로직을 잘 짜서 프롬프트를 먹이면, AI가 인터넷을 스스로 검색해 문장으로 정리하고, 블로그에 게재까지 해준다. 당신은 가만히 앉아서 광고료를 받아먹기만 하면 돼.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 내 귀에는 전혀 솔깃하게 들리지 않았다. 신규 정보의 취득이든, 자동화든 그걸 내가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는 거다. 정보의 가치는 희소성에서 나온다. 누구나 아는 정보라면 그것이 ‘정리된 상태’에 있을 때 가치를 부가할 수 있다. AI는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정리는 해주지만, 희소성 있는 정보를 다루지는 않는다. 심지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법한 뻔한 정보를, 귀한 정보인 양 과장해 말하거나 거짓말을 하기 일쑤다.
더 웃기는 건 ‘AI로 유용한 정보를 정리해 게재한다는 행위’ 그 자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걸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냥 물어보면 된다. 서울시 중구의 떡볶이 맛집을 찾기 위해 검색창에 ‘중구 떡볶이’를 입력해서 블로그 링크를 뒤지는 건 옛날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궁금하면 AI한데 그냥 물어보라고. 내가 지금 중구 어디쯤 있는데 이 근처 떡볶이 맛있는 집이 도대체 어디야?
누군가가 이 질문을 먼저 AI에게 한 후, 일말의 검토조차 없이 인터넷 어딘가에 써서 널어놓은 쓰레기 정보를 내가 참고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절차로 정보가 쓰레기가 되고, 쓰레기가 또 쓰레기로 복제된다. AI는 늘 새로운 정보를 획득하지만, 사실은 쓰레기이거나, 쓰레기를 복제한 쓰레기일 경우가 더 많아졌다. 그래서 정보는 종말했다.
나는 검색창이나 AI에게 맛집 정보를 잘 묻지 않는다. 남이 말해주는 정보인지, 쓰레기인지보다는 직관을 더 믿는다. 언젠가 집사람을 태우고 어딘가 가다가 식당 간판 하나를 보게 됐다. ‘○○찜’이라고 적혀 있는 흔하디 흔한 식당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집 음식을 맛보고 싶었다. 운전대를 잡고, 앞의 신호등을 바라보며 조수석에 앉아 있던 집사람에게 얘기했다. 이상하게 저 집이 당기네? 집사람이 깜짝 놀랐다. 나도 방금 차 돌리자고 말할 참이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둘 다 배가 무척이나 고픈 상태였던 것 같다.
○○찜의 해물찜은 정말 맛있었다. 시장기가 아니었다. 우리 부부의 직관이 발동했던 거였다. 입소문을 타는 집인지 밥때가 아닌데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더 재미있는 일은 나중에 일어났다. 어느날 집사람의 친구가 자기네 동네에 정말 맛있는 해물찜집이 있다며, 같이 가보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 부부가 친구에게 되물었다. 혹시 거기 ○○찜 아니야? 친구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아? 셋이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찜처럼 아는 사람만 알고, 검색엔진과 AI는 전혀 모르는 맛있는 식당을 몇 군데 더 알고 있다. 서울에도 있고, 부산에도 있고, 로마나 히로시마에도 있다. 직관은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사실은 틀릴 때가 더 많다. 직관을 증명해주는 것은 경험이다. 틀린 직관은 가치가 없다. 하지만 틀리든, 맞든 직관을 증명해주는 경험은 언제나 가치가 있다.
그런데 검색과 AI가 경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AI나, AI로 자동화해서 만든 블로그가 추천해주는 식당에 가서, 그들이 추천해주는 메뉴를 고른다. ‘실패’의 확률을 줄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사이 경험의 기회도 그만큼 줄어든다. 새로운 뭔가를 발견할 가능성이 아예 ‘제로’가 된다.
AI로 한 달에 책 한 권 쓰기. AI 블로그 자동화로 연 1억 벌기만큼이나 이 문구도 많이 봤다. 제목만 보고 글쓰기 노동자로서 생계의 위협을 느꼈다. 하지만 실제로 내용을 뜯어본 후에는 오히려 자신감이 생겼다. 아직 굶어죽을 때는 아닌 것 같다.
AI가 있건, 없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글을 쓸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거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AI로도 잘 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AI가 아니라 AI 할아버지를 갖다 줘도 못 쓴다. 경험을 거치지 않은 글일수록 AI에 더 많이 기대게 된다. 고유의 경험과 사유없이 좋은 글을 쓸 수는 없다.
AI만으로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글을 못 쓰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좋은 글이 어떤 건지, 안 좋은 글이 어떤 건지 가려낼 능력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흰 바탕에 글자만 채워 넣는다고 다 글이 아니고, 다 책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AI로 쓴 글은 티가 난다. 하지만 AI를 사용해서 썼더라도 잘 쓴 글은 그렇게 한 티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의 생각과 경험이 더 많이 배어나온다. 이 차이를 모르는 채로 어디 가서 ‘AI로 글을 쓸 수 있어요’라고 얘기하면 안 된다.
나는 과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라서 AI가 어디까지 발전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려하는 대로 AI가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지구상의 글쟁이들을 모두 치워버리는 세상이 빨리 올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그런 세상이 오면 나는 이미 죽어 있거나, 살아 있어도 글을 쓸 이유와 능력이 소멸된 뒤일 거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어디선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던 LLM들의 성장이 정체됐다는 뉴스를 봤다. 여태껏 LLM은 인간이 만들어둔 정보들을 먹어치우며 진보했다. 그런데 더 이상 먹어치울 정보가 없다고 한다. LLM은 이제 인간이 만든 정보 대신 인간이 AI를 이용해 복제한 정보를 먹는다. 인간이 경험하지 않는 이상, 인류도 AI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게 내 빈약한 상상력의 끄트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