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글쓰기 노동자의 일상기록(6)_히로시마 #2
모모카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길을 되짚어나왔다. 낡은 간판이 나부끼는 어시장을 지나 소학교를 지날 때 운동장에서 소프트볼 시합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봤다. 토요일에 연습을 하고, 일요일엔 시합을 한다. 바다쪽 변이 좁게 트여 있는 작은 선창(船艙)을 지날 때 떡밥을 뿌리는 아이도 봤다. 밤사이 길을 잘못 들어 선창에 갇힌 물고기들을 노리는 게 분명했다. 높고 푸른 늦가을 하늘이 수평선 끝에서 바다와 선명하게 겹쳐졌다. 무카이지마의 완벽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무카이지마의 마을들은 오노미치와 거의 비슷하지만 조금 더 낡았다. 마당에서 귤과 레몬이 익는다. 내 어릴 적 기억은 서울 변두리의 한 골목길에서 시작한다. 그 골목에는 나무 마루에 통로가 좁고 마당 있는 일본식 가옥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의 골목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는 지금도 그 골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지만 더 이상 그곳엔 골목길이 없다.
무카이지마에는 오노미치로 건너가는 페리 터미널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전날 내가 이용한 무카이지마 페리 터미널이고 오노미치역 앞으로 연결된다. 서쪽에는 후쿠모토 페리 터미널이 있다. 작은 만을 통해 조금 더 섬 중심 가까이 배가 들어온다. 나는 후쿠모토로 방향을 잡았지만 동쪽으로 조금 돌아가기로 했다. 전날 지나쳤던 고토음료수공업소(後藤飲料水工業所)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일본에는 라무네(ラムネ)라는 탄산음료가 있다. 레모네이드(lemonade)의 일본식 말이다. 고토음료수공업소는 3대 이상 라무네를 만들어온 곳이다. 처음 이곳을 지나칠 때는 음료수병을 씌우는 금속 뚜껑을 만드는 철공소인 줄 알았다. 눈이 부셔서 간판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는데, 공업소(工業所)라는 말만 갖고 지레짐작을 했던 것 같다. 음료수(飲料水)라고 분명히 적혀 있지만, 사람의 눈과 마음이 원래 그렇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마음 가는 대로 짐작해버린다.
고토음료수공업소가 지금도 음료수를 만드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팔기는 한다. 페리에 자전거를 싣고 들어와 섬을 도는 관광객들이 들러 음료수를 마신다. 나는 라무네 한 병과 함께 오래된 일본 만화가 프린트된 마그네틱을 샀다. 시간이 지나면 이 마그네틱이 내가 무카이지마에 왔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겠지.
배 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이고 싶어서 후쿠모토를 택했지만 시간거리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배가 떠난 지 불과 몇 분 만에 나는 다시 오노미치로 돌아왔다. 그래도 100엔이라는 배삯은 여전히 뭔가 좀 미안했다.
하루 예산이 정해져 있는 여행자에게 일요일은 좋은 날이다. 호텔비가 아주 많이 싸진다. 한때는 꽤 영화를 누렸을 것이 분명한, 낡았지만 규모 있는 호텔을 값싸게 잡았다. 일본 호텔답지 않게 방이 넓고 시야가 좋았다. 체크인시간이 남아 프론트에 배낭을 맡기고 나갔는데 시간에 맞춰 돌아와 보니 내 방에 조신하게 놓여 있었다.
오노미치는 외국인보다는 현지인들에게 더 인기가 많은 관광지다. 일요일, 그것도 오후였는데도 적잖은 관광객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부분 예사롭지 않게 옷을 차려 입은 젊은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오노미치혼도오리(尾道本通り) 구석구석을 누비며 사진을 찍고, 뭔가를 먹기 위해 줄을 선다. 이들 덕분에 오노미치의 식당들은 주말에도 문을 닫지 않는다. 이것도 여행자에게는 좋은 일이다. 나는 해가 저물기를 기다려 다시 미덕을 찾아갔다.
고작 두 번 째 방문인데 여주인이 나를 알아봤다. 고작 하루를 걸렀을 뿐인데 어제는 뭐하느라 안 왔냐고 물었다. 이 대화가 한국어였으면 조금쯤은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모국어가 다른 사람끼리의 적당한 거리는 때때로 친절과 호감을 증폭시켜준다.
일본 술집에서 사람들은 보통 생맥주나 하이볼, 잔술을 마신다. 병소주에 단련된 한국의 술꾼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첫 번째 방문에서 배가 불러 미처 주문을 못한 전골(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과 함께 600ml 정도 되는 25도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이 전골이 미덕의 시그니처 메뉴 같았다. 테이블마다 놓인 가스렌지 위에서 전골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여주인이 휴대폰을 들고 와 구글 번역기를 켰다. 내 주문이 난감한 모양이었다. 첫째, 이 전골은 매운 된장을 사용한 것이라 매우 맵다. 둘째, 네가 시킨 술은 너무 많다. 나도 번역기를 켰다. 한국 사람들은 고추장을 먹는다. 여주인이 크게 웃더니 상 위에 가스렌지를 펼쳐 놓았다. 하지만 잠시 후 안주와 함께 내온 술은 소주 한 잔이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이건 내가 시킨 술이 아닌데? 여주인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건 너무 많아. 나는 아무 대답 없이 술잔을 비우고 다시 주문했다. 역시 안 되겠다. 병으로 줘. 남으면 내가 들고 갈 거야. 나는 결국 술병을 다 비웠다. 매운 된장이라는 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얇게 저민 소고기와 대장이 들어 있는 붉은 국물 전골은 피맛골 어느 집에서 팔던 섞어찌개처럼 내 입에 잘 맞았다.
일요일밤이었지만 미덕에는 여느 밤처럼 손님이 많았다. 주방에서 안주를 만드는 남자, 홀에서 안주를 나르는 여자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전골 말고 몇 접시의 안주를 더 해치운 후 계산을 치르려는 나에게 여주인이 다가와 엽서를 내밀었다. 오노미치또와!! 고마워. 뒷면에 또박또박 예쁜 글씨가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적혀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다.
다음날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일찍 기차에 올랐다. 일식과 양식이 잘 조화된 훌륭한 조식이었다. 나는 양식에는 조금도 눈을 돌리지 않고, 생선구이와 낫토, 카레라이스와 미소국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갈 길이 멀었다. 오노미치에서 출발해 미야지마까지 가려면 히로시마를 지나야 했다. 기차로 두 시간 가까이 걸렸고, 짧지만 배도 타야 했다.
미야지마구치역에서 내려 개찰구를 통과하기 전에 교통카드를 충전했다. 사람이 없는 기계를 골랐는데도 내 뒤에 여럿이 줄을 서서 부담스러웠다. 역시나 한 번에 충전이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일단 순서를 양보하고 맨 뒤에 다시 줄을 섰다. 한사코 먼저 용무를 보라고 손짓을 하던 할머니 한 분께서 충전을 하고 나서도 기계 앞을 떠나지 않았다. 멍청해 보이는 외국인 여행자가 잘 충전을 하는지 봐주려는 거였다. 나는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해 전혀 문제없으니 신경 쓰지 말고 갈길 가시라 말씀해드렸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서 그냥 알았다고 하고 가버리는 일본인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충전에 실패한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의 교통카드 충전기는 현금으로만 충전이 가능했다. 해브어나이스데이. 무사히 충전을 마치고 나가는 나에게 일본 할머니가 서툰 영어로 행운을 빌어줬다.
미야지마(宮島)는 해수면 아래에 박힌 대형 도리이(鳥居)로 유명한 섬이다. 페리를 타고 건너갈 때 처음 도리이를 보게 되는데 마치 섬으로 된 큰 신사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미야지마의 11월은 단풍이 한창인 좋은 계절이었다. 월요일인데도 엄청나게 많은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줄지어 페리에 올랐다. 도리이 옆을 지날 때는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한 쪽으로 모여들어 카메라를 들이대서 배가 기우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일본의 신사(神社)는 한국 사람에게 유쾌한 관광지가 아니다. 그건 나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나는 반대쪽에서 서서 먼 바다를 내다봤다. 간조로 물이 빠져 도리이가 밑둥까지 다 드러난 상태여서 별다른 감흥이 일지도 않았다.
미야지마는 페리 터미널 근처와 산책로에 형성된 상가 말고는 마을과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는 작은 섬이다. 아마도 상주인보다 그곳에 사는 사슴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으면 시나브로 사슴이 따라붙어 먹을거리를 보챈다. 터미널 앞 벤치에서 처음 만난 사슴 한 마리는 내가 터미널에서 들고 나온 한국어 지도를 먹어치웠다. 나는 적당한 곳 어딘가에 배낭을 묶어두고 홀가분하게 미야지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터미널 안 어딘가에 코인로커가 있을 터였지만 경험상 그런 곳에는 배낭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한두 시간 정도라면 어딘가에 무심하게 던져두는 게 더 합리적이고, 배낭여행자스럽다.
일본에서는 꽤 이례적으로 입장료를 받는 신사를 그냥 지나쳤다. 통로와 건물 일부가 해수면 위에 떠 있어 그런 거겠지만 신사는 신사이고, 물은 빠져 있는 상태였다. 물이 적당히 들어와 있는 날에는 그곳에 앉아 차를 마시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나는 일본의 신에는 관심이 없고, 차보다 커피를 더 좋아한다. 바닷가를 따라 난 길을 걸으며 단풍을 즐기고, 길 끝에서 아쿠아리움을 관람했다.
주변 생물들로 구성된 미야지마수족관의 입장료가 생각보다 비싸서 짜증이 났지만, 그럭저럭 볼 것들은 제법 있는 곳이었다. 근해의 생태계를 구현했다고 하는 작은 수족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생물이 펭귄과 바다사자라는 게 웃겼다. 시간을 정해 사육사들이 펭귄을 데리고 나와 관람객들이 만질 수 있도록 해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미야지마수족관에 어서 오세요. 극지의 바다사자와 펭귄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원래 그렇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게 한 나절 미야지마를 둘러보고 난 후에는 스타벅스 2층에 올라가 커피를 마셨다. 2층 발코니에 의자가 놓여 있었고, 아마도 먼 발치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그 해상 도리이가 보였던 것도 같다. 관광지의 좋은 목은 스타벅스나 맥도날드가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커피나 햄버거보다 부동산으로 장사를 더 잘 하는 곳들이니까 그러려니 해버린다.
섬나라라서 그런 걸까? 기차는 어처구니없이 비쌀 때가 있고, 배는 어처구니없이 쌀 때가 있다. 일본의 교통비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미야지마 페리의 배삯은 편도 100엔이고, 150엔의 입도세(入島稅)를 내야 한다. 교통카드에서 총 350엔의 왕복 배삯과 입도세가 차감됐다.
미야지마에서 본토의 미야지마구치로 건너와 히로시마로 되돌아오는 길은 노면전차를 이용했다. 노면전차는 나름대로 멋은 있지만, 효율성 면에서는 최악인 경우가 많다. 도로에 선로를 설치해야 하고, 속도도 빠르지 않다. 2량 이상을 연결할 수 있지만 버스도 굴절버스가 있다.
간혹 우리나라 지자체에서 이걸 만들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굳이 왜?’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느리게 가는 노면전차 꽁무니를 운전해서 졸졸 따라가는 상상을 하면 답답해서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오래 된 도시에는 대부분 이 교통수단이 있지만 관광객이라서 좋지, 현지인 입장이라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나는 일본 여행을 할 때 교통카드(IC카드)를 애용한다. 일본은 지역마다 IC카드가 다른데 서로 결연을 맺어 호환되는 경우가 많고, 모두 JR(Japanese Railroad)을 이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기차는 기본이고 많은 버스와 배를 IC카드 한 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 심지어 편의점 결제도 가능하다. 내가 쓰는 IC카드는 홋카이도 것이지만 히로시마에서도 사용이 가능해 새로 카드를 살 필요가 없었다. 히로시마의 노면전철에서도 홋카이도의 IC카드, 키타카(Kitaka) 카드가 통한다.
재미있는 것은 노면전차에서 결제 방법이었다. 2~3량으로 된 히로시마 노면전차에는 각 량마다 출입구가 여러 개 있지만 IC카드로 결제할 때는 맨 앞의 출구 한 개만 이용이 가능했다.(정확하게는 구형 차량에서만 그렇게 한다는데 나는 그놈의 신형 전차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차가 서기 전에 승객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차가 정확히 멈춘 후에야 사람들이 움직여 줄을 서고, 한 명씩 운전석을 지나쳐 카드를 태그한다. 상상만 해도 답답해 미칠 것 같지만 정작 일본 사람들은 평온하다. 간혹 문제가 생겨 지체될 때도 급하게 움직이거나 채근하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많은 일본인들은 IC카드 이외의 교통비 지불수단을 갖고 있고,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결제한 후 전차 중간 문에서도 내린다. 심지어 차장이 왔다갔다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노면전차는 그리 빠른 교통수단이 못된다. JR로 30~40분 거리인 미야지마구치에서 히로시마 시내의 에비스초까지 한 시간이 더 걸렸다. 배낭이 번거로웠지만, 퇴근시간의 번잡한 현지 분위기를 체험하는 데 만원 전철 만한 게 또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은 일요일 못지 않게 숙박비가 저렴한 날이다. 적당한 가격으로 예약해둔 호텔에 짐을 풀고 나와 술 몇 잔과 저녁을 먹었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 호텔에 루프탑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프런트에 가서 옥상에 갈 수 있느냐 물었더니 방수백에 담긴 반바지를 내줬다. 영문을 모른 채로 그것을 받아들고 루프탑에 도착했다. 초저녁 사람 그림자가 없는 어두운 옥상에 더운물이 가득 찬 풀(Pool)이 여러 개 설치돼 있었다. 옥상 온천이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자판기 맥주를 한 캔 뽑아 풀에 들어갔다. 스위치를 누르니 노즐에서 뿜어져 나온 센 물살이 전신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5000엔짜리 호텔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호사.
캔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어 난간 너머를 바라봤다.
높지 않은 건물들 사이로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원폭돔의 실루엣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