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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 히로시마 #1

AI시대 글쓰기 노동자의 일상기록(4)

by Lazist

여행이야기 | 히로시마 #1

[사소한 공지]

제가 임의대로 연재하던 글을 브런치북으로 묶으면서 초반 글 세 개가 동시에 업로드됐습니다. 브런치북 두 번째 글이 제 여행의 동기와 배경을 설명해주는 성격의 글입니다. 잠시 링크 걸어두겠습니다.





히로시마


히로시마를 여행지로 정한 것은 다분히 우발적이었다. 언젠가 신후지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프랑스 청년이 다음 행선지로 히로시마를 얘기했을 때, 서핑하러 가는 거야? 라고 물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히로시마(広島)는 나가사키와 함께 원폭을 맞은 두 개의 도시 중 하나라는 인상이 더 강한 것 같았다.


첫날 히로시마 호텔에 짐을 풀었을 때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2km를 걸어 원폭돔을 보러가기로 했다. 강인지 바다인지 모를 물길을 따라 난 산책로를 거슬러 올라가니 생각보다 더 간단하게 나타났다. 밤조명을 받은 흉물에서 음습한 기운은 전혀 나지 않았다.

지상 25m 높이의 원폭돔(原爆ドーム)은 1919년에 지어져 1945년 8월 원폭으로 파괴됐고, 그 상태 그대로 비극을 증명하게 됐다. 히로시마에는 희한하게 여겨질 정도로 동아시아 관광객이 적고 백인 관광객들이 많았는데 역시나 그들은 먼발치서 그날의 비극을 되씹듯이 쳐다봤다.


내가 미국인이라면 기분이 묘할 것 같았다. 일본은 제국주의의 가해자이고, 원폭의 피해자다. 불가피성을 아무리 크게 고려하더라도 역사의 변명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엄청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상황은 없다. 원폭돔을 한바퀴 돌고 에비스초도오리(戎町通)에 들어서기 전 백인 관광객들이 한 오코노미야키 집 앞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원폭돔을 보고나서 먹는 히로시마 명물 소바 오코노미야키의 맛은 어떤 것일까.



오노미치


다음날 아침 나는 전철(산요 본선)을 타고 오노미치(尾道)로 갔다. 보통의 여행자들은 당일치기로 일정을 잡는 곳이다. 사실 나는 원폭돔보다 오노미치가 더 보고 싶었다.

오노미치는 해운대를 바라보는 부산의 비탈길과 닮았다. 역 앞에서 페리를 타고 100엔을 지불하면 건너편의 무카이지마(向島)로 건너갈 수 있다. 편도 500엔을 주면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인 센코지 전망대까지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 첫날 숙소에 짐을 던져놓고 전망대에 올랐다가 해질녘에 걸어서 내려왔다.

센코지공원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몇 개의 절과, 하나의 미술관, 그리고 고양이골목이 있다. 이걸 보면 모든 게 끝난다. 더 이상 뭘 볼 게 없다. 오랜만에 여행자센터에서 지도까지 받아들고 샅샅이 뒤져봤지만 더 이상 뭘 하거나, 볼 게 없었다. 다 되었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라면과 볶음밥으로 구성된 세트메뉴로 배를 채우고 숙소 침대에 누워서 구글맵을 켰다. 오노미치는 해안가 어촌이고, 바다와 나란히 상가가 나 있다. 그게 다다. 끝에서 끝까지 한 번 걸어나 보자, 하고 어두워진 상가 탐방에 나섰다. 불켜진 곳이 드물었다.


생수라도 사서 들어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어두운 길을 계속 걸었는데 상가 끝에 다 가서야 로손(Lawson)이 보였다. 그곳에서 주전부리감 몇 개를 사들고 사람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발견했다. 대중주처(大衆酒處) 미덕(米德). 일본말로는 어찌 읽는지 모르겠다.

관광객들을 노린 상가의 이지카야들과는 사뭇 다른 철저한 로컬들의 술집. 라면 세트로 이미 배가 부른 상태였지만, 두 접시의 생강 시메사바와 몇 접시의 다른 안주, 아츠캉 사케를 연거푸 마셨다. 모든 게 좋았다. 일본에서 먹어본 라면 중 가장 맛있는 라면을 먹었고, 현지인들이 바글거리는 로컬 술집을 발견했다. 일진이 좋은 여행자에게 따르는 가장 큰 행운이다.


주방의 남편과 홀의 부인은 일본에서 꽤나 흔한 조합이다. 두 젊은 남녀가 부부 사이인지 아닌지는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계속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아르바이트생에게 술을 시키면 주방에 들어가 잔을 채워 남자에게 건네준다. 남자는 술을 데우고 안주를 만든다. 젊은 여주인은 내가 시킨 안주는 너무 양이 많다며 작고 싼 안주를 추천해줬다.

11월의 오노미치는 한낮에 20도가 넘었다. 날이 춥지 않았는데도 데운 사케가 당겼다. 오노미치에 더 머물 이유가 생겼다. 사케를 제법 들이키고 미덕에서 나와 상가를 한참 더 싸돌아다니며 술을 깨웠다. 다음날 무카이지마에 건너갈 계획을 세우며 잠자리에 들었다.




무카이지마 마린유스센터


어느덧 여행 사흘째였다. 나는 배낭을 메고 무카이지마행 페리에 몸을 실었다. 불과 몇 분 만에 오노미치에서 무카이지마로 데려다주는 페리에 배낭을 메고 타는 여행자는 많지 않다. 여행자들은 배낭 대신 자전거를 끌고 페리에 오른다. 무카이지마는 자전거 여행의 성지다. 그들은 해안도로를 따라 라이딩하며 시마나미카이도(しまなみ海道)를 즐긴다. 섬은 바다의 산이다. 가운데가 봉긋할 뿐 해안을 따라 난 길에는 오르막내리막이 없다.


나는 섬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중심을 가로질러 5km 넘게 걸어갔다. 한 번의 경사가 있었지만 가파르지 않았다. 거의 남쪽 해안에 다다랐을 때 운동장이 넓은 소학교가 나타났다. 그곳에서 포니테일을 한 여자아이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공을 뿌려대고 있었다. 아이들이 소프트볼 연습을 하는 소학교 운동장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맞은 편 해안가 어시장의 낡은 간판이 깃발처럼 바람에 덜렁거렸다.


얼마를 더 걸어 마린유스센터(Marine Youth Center)에 도착했다. 지자체에서 세운 일종의 해양 휴양공원이다. 어린이 대상의 교육프로그램과 캠핑장을 운영한다. 생각보다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았다. 토요일이라 좋은 텐트 사이트는 자리가 다 찼고, 주차장 위의 임시 사이트에 자리를 얻었다. 젊은 여직원이 외국인이 어찌 알고 찾아왔는지 신기하다고 했다. 텐트를 잘 쳤는지 안부까지 물으러 와줬다. 이름을 물었더니 모모카라고 했다. 나이는 안 물어봤는데 스물여섯 살이라고 TMI를 누설했다. 응, 딸뻘이네.

린유스센터는 데이캠핑과 나이트캠핑을 나눠 운영한다. 내가 신청한 것은 나이트캠핑이었고 오후 3시 이후에 텐트를 칠 수 있다. 점심을 먹으러 가야하고 밤새 먹을 음식 장도 봐야 했다. 구글맵을 찍어보니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 2.5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왕복 5km면 한 시간 정도 보면 된다. 배낭을 두고 갈 수 있으니 30분 걸어 밥 먹고, 장 보기에 나쁘지 않은 거리였다. 하지만 한 시간 넘게 걸려 편의점에 도착했다. 해발 100m 이상의 고개를 넘어야 했다.


고생이야 한 걸로 치면 되는데 그 사이 점심시간이 넘어가버렸다. 한적한 섬의 식당은 브레이크타임이 길었다. 음식과 물, 캔음료 몇 가지를 사고 편의점 도시락을 데워 먹었다. 밥을 먹다 목이 메어서 음료수 냉장고 쪽을 살폈다. 작은 음료수를 살까, 말까 귀찮아서 망설이는데 편의점 여주인이 PET병에 담긴 차를 내밀었다. 전날부터 행운이 과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다른 길로 코스를 잡았다. 10분을 더 돌지만 평탄한 길이었다. 다시 소학교와 어시장을 지나쳤고, 강속구를 던지는 포니테일을 봤다.


마린유스센터에 복귀했을 때는 오후 4시가 다 돼 있었다. 무카이지마는 서울보다 훨씬 남쪽이라 따뜻하지만, 해 길이는 같다. 해가 지기 전에 텐트를 쳐야 했다. 어두워지면 번거로움이 배가 된다. 텐트를 치고, 샤워까지 다 마쳤을 때는 완전히 컴컴해졌다. 라면과 햇반을 끓이고, 1회용 컵에 담긴 사케를 마셨다. 곧바로 침낭에 들어갔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자다 깨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답답해서 텐트 입구 지퍼를 내렸다. 그대로 반듯이 누워 하늘을 보니 별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저런 별하늘은 그랜드캐년에서도 보지 못했던 거다.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번 여행에는 행운이 많이 따르는구나.


다음날 아침 텐트를 걷고 있는데 모모카가 다시 찾아왔다. 휴대폰을 꺼내 번역기를 돌리며, 밤에 춥지는 않았는지, 씻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이것저것을 물어봤다. 마린유스센터에는 쓰레기통이 없다. 모든 이용객은 쓰레기를 들고 돌아가야 한다. 모모카가 쓰레기를 대신 버려주겠다고 했다. 오노미치와 무카이지마를 잇는 선에 모모카와, 미덕의 여주인과, 로손 편의점 점장의 친절이 잘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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