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글쓰기 노동자의 일상기록(2)
지금으로부터 10년은 더 지난 옛날 일이다. 나는 ‘실장’ 타이틀을 단 직장인이었다. 작은 회사의 실장은 하는 일이 많았다. 거의 매일 야근을 했고, 일을 마치면 집에 가지 않고 동료들이나 클라이언트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일거리를 물어오는 것도 실장의 역할이었다. 오전에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클라이언트를 만나고, 오후에는 새 일감을 잡기 위한 비딩(bidding)을 하고, 밤에는 다음 비딩을 위해 기획안을 만들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
나는 회사에서 끼니를 잘 챙겨먹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어느 사원이 과장에게 물었다. 우리 실장님은 밥도 잘 안 먹는데 무슨 힘으로 일해요? 과장이 대답했다. 저 사람은 밥 안 먹고 충전해.
어느날 이러다가 얼마 못 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프리랜서 글쓰기 노동자가 되기로 했다. 그러면 적어도 썰렁한 사무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채로 죽지는 않겠지. 사표를 내고 두어 달을 더 출근했다. 매일매일 필사적인 느낌이었다. 출근하기 싫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출근을 하던 날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얼큰하게 취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안에서 아주 오래 전에 본 다큐멘터리 한 편이 생각났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과 일본 큐슈의 사찰순례를 다룬 다큐였다.
집에 돌아와 잠자고 있던 집사람을 깨워 침대에 앉혀놓고 얘기했다. 산티아고에 가야겠어. 집사람은 응, 한 마디 하고 한동안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허락을 받아낸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어 할 말을 잊은 나에게 집사람이 다시 말했다. 다녀오라고. 나 화내는 거 아니야. 집사람이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까 순례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편도 900km를 걸어갈 준비만 하면 됐다. 난생 처음 트래킹화와 배낭을 사고, 10Kg 안팎에서 알뜰하게 짐을 쌌다. 파리로 입국해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프랑스길의 출발점 생장(Saint-Jean) 가는 기차표를 사기까지 약 한 달의 기간 동안 무척이나 행복했다.
결과적으로 2013년 가을 나는 그 길을 완주했다. 죽어도 길 위에서 죽겠다, 사뭇 비장한 결심까지 하고 나섰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카미노를 마치고 난 후에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중부, 남부, 시칠리를 여행했다. 큰 도시까지는 기차나 버스, 비행기를 이용했지만 도시 안에 들어가면 거의 걸어 다녔다. 그러면서 알게 됐다. 이게 나와 맞는구나.
세상에는 여러 가지 여행 방식이 있고, 그것은 대체로 속도로 구별된다. 사람들은 시간과 돈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여행에 투입한다. 돈이 많은 대신 시간이 없는 사람이 있고, 시간은 있는 대신 돈이 없는 사람이 있다. 어떤 경우이든 자원이 부족하면 여행의 속도는 빨라진다. 시간이 적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여행지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하면 결국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한 가지 자원을 고정해서 둘 중 하나의 변수를 없앤다면? 속도를 늦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내가 더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이 뭔가부터 생각해야 했다. 결론을 내리기 어렵지 않았다. 시간이 쉽다. 나는 프리랜서 글쓰기 노동자이니까. 시간을 벌자. 그리고 돈을 가능한 조금 쓰자.
하지만 한동안 나는 여행을 갈 수 없었다. 다음 목표는 카미노의 또다른 루트 포르투갈길이었다. 그길을 걷는 데는 적어도 한 달은 필요했다. 나의 유일한 유휴자원인 시간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속절없이 시간만 보내다 막 준비를 시작할 무렵 코로나19가 터졌다. 그 후 몇 년 동안 포르투갈은커녕 그 어떤 곳이라도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코로나19가 세상을 점령한 사이 가능한 많은 시간과 최소한의 자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한 달은 어려워도 프로젝트 사이의 1~2주 정도는 충분히 시간을 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일단 결정을 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캐리어를 버리고, 배낭을 샀다. 개인용 텐트와 버너 같은 최소한의 캠핑장비도 장만했다. 밤에 잠자리 들기 전에 몇 시간씩 여행 유튜브를 봤다. 욕심을 버렸다. 이상하게 유럽 같이 멀고 여비가 많이 드는 곳은 더 이상 가보고 싶지가 않았다.
다소 엉뚱하게도 팬데믹 직후 첫 여행은 미국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들어가 이정후와 김하성이 동시에 출전한 야구경기를 보고, 다음날 그랜드캐년 투어를 떠났다. 1박2일 투어를 하면서 생각했다. 생각보다 별 거 없네. 그랜드캐년이 세계 1등 협곡인 이유는 그곳이 최고의 협곡이라고 우길 수 있는 강한 나라, 미국에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저런 곳은 어디에나 있지는 않아도, 어딘가에 분명 비슷한 곳이 더 있다. 눈과 귀를 크게 열어놓으면 언젠가 나만의 그랜드캐년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간을 잡고, 속도를 늦췄다. 가능한 많은 일정을 한정된 시간에 때려 넣고 바쁘게 움직이는 여행 같은 건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동선과 시간계획이 단순해졌다. 때가 되면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간다. 첫날의 숙박지만 정한다. 마음 가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시간이 되면 돌아온다. 나는 캠핑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기피하는 축에 속한다. 그래서 최소한의 장비를 사들인 건 캠핑여행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보험이었다. 이런 식의 여행에는 늘 리스크가 따른다. 여행 중에 마땅한 숙소를 구하지 못하면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자야하고, 먹어야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꽤 여러 번 여행을 했지만 숙소를 못 구해 노숙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로지 내 선택에 의해 매 여정마다 하루 이틀 정도는 밤하늘의 별이나, 일출과 일몰을 보기 위해 텐트를 쳤다.
나는 여행 중에 후진을 하지 않는다. 캐리어를 끌고 다니지 않는 게 이런 이유에서다. 내가 지금 서울역에 있고 동대문까지 가야 한다면, 배낭을 메고 남대문 들러, 명동을 돌아 종로3가든, 종로5가든 갈 수 있는 만큼 가서 지하철을 타고 남은 길을 가면 된다. 그런데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면 다르다. 종로5가까지 갔다가 코인로커나 여행자센터에 맡겨둔 캐리어를 찾기 위해 서울역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끌고 동대문에 있는 숙소까지 지하철을 타고가야 한다. 몸도 힘들고 차비도 더 든다. 가장 아까운 건 시간이다. 지하철과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
내가 서울에 처음 온 여행자라고 가정해보면 이해가 쉽다. 오늘 명동의 숙소에서 일정을 시작해 남대문과 덕수궁, 경복궁에 서촌과 북촌을 훑을 계획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교통수단을 택하겠는가? 나는 걷는다. 그게 빠르다. 그렇게 걷다가 지하철이나 버스는 강남역쯤에나 갈 때 타면 된다.
이런 여행은 점(點)으로 분절된 여정을 선(線)으로 이어준다. 종각에서 종로5가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 많은 것을 놓친다. 종각과 종로5가가 분절된 여정으로 남는다. 지하철은 더 심각하다. 두 점 사이의 간극이 지하의 어둠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그 길을 걸으면 선이 된다. 종각의 횡단보도를 가득 채운 직장인들의 행렬과 파고다 공원 앞에 모여든 노인들의 주름진 웃음, 거대한 유적처럼 숨죽이고 있는 세운상가와 종로 끄트머리의 서점 골목까지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해준다.
이런 여행은 하루 이상 비행기를 타고가야 도달할 수 있는 먼 여정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동남아시아든 정해진 시간을 온전히 다 여행에 몰아 쓸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어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최근에는 일본을 오가는 비행기 값이 매우 쌌다. 그래서 나는 1년 사이 일본에만 세 번을 다녀왔고, 매 여행마다 1~2주를 체류했다. 태국 치앙마이에서는 3주 가까이 머물며 디지털 노마드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물론 시간을 더 만들 수 있다면 대만을 철도로 일주하거나, 언젠가부터의 꿈이었던 스리랑카를 털거나, 아시아도 아니고 유럽도 아닌 그 중간쯤의 나라들도 같은 방법으로 돌아볼 생각이다. 마음먹는 순간 뒤를 돌아보지 않을 자신만 유지한다면, 가능해질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생각한다.
일본을 기준으로 내가 쓰는 예산은 1일 10만 원 정도다. 싼 숙소를 기민하게 잡아 예산을 아끼고, 저녁에는 남은 돈을 음식과 술에 아낌없이 털어넣는다. 멀지 않은 거리를 길게 여행하니 교통비는 그리 많이 들지 않는다. 대신 고궁이나 미술관 입장료는 아끼지 않는다. 여행 기념품으로는 마그넷 딱 한 가지만 사는데 그곳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라 판단되면 그걸 사는 돈도 아끼지 않는다.
예산을 초과하는 날도 꽤 있었지만, 오는 날 총액을 보면 대체로 예상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가장 최근의 여행인 히로시마에서는 왕복 항공료 30만 원을 포함, 100만 원 내외를 썼다. 일주일 간의 체류기간을 볼 때 1일 10만 원의 예산을 착실히 집행한 셈이다.
나는 여행비용 통장을 따로 갖고, 그럭저럭 잔고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오로지 돈이 없어서 떠는 궁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내가 예산을 정하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이유는 딱 한 가지 때문이다. 다음 여행에 부담을 주지 말자. 어쩌다 한 번 사치를 부릴 수도 있지만, 자꾸 그러다 보면 결국 다음 여행을 나갈 내 마음이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갖힐까봐 두렵다.
그렇게 여행하면서 시즈오카와 시미즈를 거쳐 후지산을 선으로 연결했고, 삿포로와 오타루, 후라노와 비에이도 연결했다. 치앙마이게이트에서 땡모반을 만들어 팔던 소녀, 빠이 리조트에서 맥주와 로컬 위스키를 홀짝이며 함께 트럼프에게 쌍욕을 날렸던 미국 중년남자와 친구가 됐다.
나는 앞으로 간간이 여행 에세이를 쓸 거다. 그런데 이렇게 여행하세요, 여기가 좋아요, 꼭 가보세요, 와 같은 가이드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여행 스타일이 있고, 부여하는 가치가 다르다. 나는 당신의 여행스타일을 무한하게 존중한다. 다만 이제부터 나도 뭔가 이야기를 시작할 테니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어떤 여행부터 시작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아마도 기억이 가장 생생한 히로시마와 오노미치, 그리고 니시히로시마역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한 4거리 정육식당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