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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종말과 여가의 탄생

AI시대 글쓰기 노동자의 일상기록(3)

by Lazist
Shall we opt for more leisure time, or more unemployment?
우리는 더 많은 여가 시간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더 많은 실업을 선택할 것인가?
- 제러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The End of Work)>


1996년 나온 책에 실린 말이니 거의 30년이 다 됐다. 리프킨의 말대로 노동의 종말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노동과 직업 상실의 위기감은 이제 먼 나라, 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됐다.


그러니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더 많은 여가인가, 아니면 더 많은 실업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딱 이거다. 디스토피아로 갈 것인가, 유토피아로 갈 것인가.

어릴 적 모든 걸 다 해주는 로봇이 나오는 공상과학 만화를 보면서 늘 생각했다. 저렇게 로봇이 모든 걸 다 해주면 사람은 뭘 해야 하는 걸까? 답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놀면 된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사람들은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상상하기를 그만둔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거다. 생산력이 올라가면, 즉 생산단가가 떨어지면 재화의 가치도 함께 하락한다. 실제로 글쓰기 노동자가 AI를 이용해 원고 생산력을 끌어올리면 원고료가 떨어진다. 나는 비슷한 광경을 아주 많이 봤다.


조판공(組版工)이라는 직업이 있었다. 여러 가지 크기로 한 자씩 양각된 금속활자를 틀에 끼워 인쇄판을 만드는 직업이다. 제법 많은 돈을 버는 고급 노동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판공들은 사진식자(사식)의 등장과 함께 일거에 직업을 잃어버렸다. 내가 처음 책 만드는 일을 배울 때는 조판공은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고. 사식의 시대를 뛰어 DTP(DeskTop Publishing)로 넘어오던 때였다. 한 마디로 컴퓨터를 이용해 책을 만들고 전단을 찍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혹자는 물어볼지 모른다. 컴퓨터로 책을 만들지 뭘로 만들어? 인류가 컴퓨터로 책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다. 인류가 컴퓨터로 책을 만든 기간은 5000년 책의 역사에서 100분의 1 미만에 불과하다. 사실 이것부터가 엄청난 역설이다. 텍스트 플랫폼이 디스플레이로 진화했는데 이걸 갖고 종이책을 만든다고?


그무렵 나는 광고회사의 출판부에서 월간과 격월간, 계간 사보를 각각 한 권씩 만들었다. 매달 수십 권의 사보가 나오는 제법 규모 있는 회사였는데 여기서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처음 봤다. 그 회사의 사장은 당시 가격으로 1000만 원쯤 하던 매킨토시를 여러 대 사들였고, 그 수만큼의 도안사를 해고했다. 매킨토시가 아무리 비싸봐야 도안사 1년 연봉보다는 쌌다. 도안사는 요즘 말로 편집 디자이너다. 사식에 쓰이는 인화지를 대지에 오리고 붙이는 이른바 ‘대지바리’가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사식시대가 도래하면서 조판사가 직업을 잃은 것처럼 DTP의 등장과 함께 도안사들도 직업을 잃었다.


사장은 꿈에 부풀었다. 명절에 보너스를 달라고 하지 않고, 회식비를 내놓으라고 하지도 않는 ‘기계’를 도입해 생산성을 혁신했으니 그만큼 수익성이 좋아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사장의 기대가 무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클라이언트들이 단가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기계가 다 하잖아? 너희들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종이를 오려내는 대신 이젠 지치지 않는 기계가 모든 걸 해주잖아? 손 안 대고 코 풀게 된 만큼 단가가 내려가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사람들은 이런 내러티브에 익숙하다. 자본주의 사회가 당연한 거 아냐?

자본주의라서 당연한 게 아니고, 자본주의도 당연한 게 아니다. 사람이 살 수 없으면 고쳐야 하는 거다. 도안사와 조판공만 사라지면 괜찮은데 많은 직업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사라지면 어떻게 하려고? 리프킨의 말 ‘여가 아니면 실업’은 이 사태를 꼬집고 있는 거다. 세상이 이렇게 변할 텐데, 노동이 종말하면 노동자에게 더 이상 돈을 분배할 수 없을 텐데 너희는 도대체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여기서 인간이 '여가'라는 달콤한 유토피아보다 '실업'이라는 쓰디 쓴 디스토피아를 선택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조금 더 어려운 길로 돌아갈 뿐인 거다. 결국은 자본주의든, 자본주의가 아닌 그 무엇이든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하게 돼 있다. 이 과정에서 다른 것은 하나 뿐이다. 피를 흘릴 것인가, 말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인간은 ‘기득권’을 지키는 인간이다. 하지만 더 무서운 인간은 생존의 위협을 받는 인간이다. 두 자(者)가 싸우면 무조건 후자가 이긴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피를 흘릴 것인가, 말 것인가?”


인간의 노동은 언제나 가치 있는 것인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인간의 노동은 세상이 그것을 제대로 셈해줄 때만 가치가 있다. 무언가가 그걸 대체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값을 ‘후려침’ 당하면 노동의 존엄성은 사라진다. 그래서 AI가 제대로 반응해서 쓸모 있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게 무서운 게 아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인간이 AI 세상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는 거다. 타깃을 잘못 올려놓는 거다.


나는 나의 노동 가치와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뭘 하고 있는가, 생각을 해봐야 한다. 제발 AI를 쓰지 말아 주세요, 라고 할 건가? 아니면 AI를 써서 AI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테니 적어도 먹고는 살 만큼 적당한 대가를 지불해 주세요, 라고 할 건가. 나는 결국 인간과 사회가 후자를 선택할 거라고 본다. 안 그러면 다 죽으니까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일을 하지 않거나, 덜 하게 된 인간은 무얼 할 건가? 아까 말했듯이 누구나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다.


놀면 된다.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고, 그걸로 일용할 양식을 얻었으면 나머지 글쓰기는 놀이가 된다. 누구나 그렇게 여기듯이 글쓰기는 놀이다. 시와 소설이 그렇고 그림과 음악이 모두 그렇다. 원시공동체 사이에도 놀이를 하는 개체, 여가를 즐겁고, 의미 있게 보내게 해주는 개체에게는 분배를 했다. 그래서 알타미라(Altamira) 동굴 벽화 같은 게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된 거다. 생산 공헌을 하지 않은 개체에게 분배를 해주지 않았다면 어떤 원시인이 벽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지금 우리 사회는 원시인 사회보다 확실히 나은 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


AI가 몰고 올 세상의 변화는 누군가가 직업을 잃는 게 아니다. 누구나 ‘여가’를 얻게 된 거다.

회사에 다니느라, 장사를 하느라 못했던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기회. 대장장이가 하루종일 걸려 만들던 낫 열 개를 두어 시간 만에 만들고 노래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드라마의 극본을 쓸 수 있는 시간. 하루 종일 걸려 썼던 기획안과 보고서를 두어 시간 만에 끝내고 골프나 야구를 하러 운동장에 갈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번 거다.


그게 AI가 만들어가는 세상이어야 한다. 예전에는 노동자 원시인 100명이 한 명의 예술가 원시인을 먹여 살렸다. 하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누구나 예술가가 된다. 왜? 여가가 생겼으니까. 일은 AI와 함께 하고 나머지 시간은 놀면 된다. ‘놀면’ 되는데, 그걸 ‘인정’하면 되는데 왜 다들 애써 외면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여가야? 실업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업자가 되는 디스토피아를 선택할 건가 아니면 모두가 예술가가 되는 유토피아를 선택할 건가. 솔직히 나는 모든 답이 이미 나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노는 자에게도 밥을 줘라. 그게 아니면 인류는 멸망한다. 어차피 그렇게 되게 돼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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