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의 치유

by 류정희

한밤중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극심한 통증이 고요한 어둠을 깨웠다. 누군가 머리를 쾅쾅 두드리는가 싶더니 이내 지진이 난 듯 머릿속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심한 두통에 당황한 나는 하릴없이 심호흡으로 맞서며 버텨보았다.


아무래도 참을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급히 응급실로 향하는데 속이 메스껍고 오심이 심해졌다. 뇌와 연관된 전조 증세인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극한 상황을 마주하게 될 두려움도 컸지만, 신변을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될까 봐 그것이 더 무서웠다.


복잡한 응급실에서 처치를 기다리다 깜박 잠이 들었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냥 도둑이 아니라 무장한 강도들이었다. 발이 얼어붙어 쩔쩔매고 있는데 중학생인 딸아이가 프라이팬을 들고 맞섰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고 머리는 나를 떠미는데 야속한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붙박이처럼 움직이지 않는 발과 씨름을 하는 동안 딸아이가 그들 손에 잡혔다. 현관문 밖으로 끌려가는 아이의 슬픈 눈빛이 나를 원망하는 것인지 나를 안쓰러워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눈을 뜨니 머리의 통증은 다소 가라앉았다. 하지만 꿈속의 일이 현실인 양 가슴이 뛰었다. 위기의 순간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에 마음이 무거웠다. 비록 꿈에서의 일이라 해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대로 병원에 주저앉는다면, 내가 나를 추스르지 못할 최악의 순간이 온다면, 그래서 아이를 보호하기는커녕 아이의 손을 빌려서 살아가야 한다면…. 방정맞은 생각에 잠시 마음이 무너졌다.


검사 결과 뇌에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는 애매한 답을 의사에게서 들었다. 신통치 않은 결과에 답답해하는 내 표정이 읽혔는지 의사가 내게 말했다.


“스트레스를 좀 적당히 받으셔야죠.”


졸지에 나는 과도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절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적당량의 스트레스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의사의 말을 들을수록 두통의 원인을 찾을 방법은 요원해지는 것 같았다. 복잡한 심정으로 자리를 일어서는데 의사가 덧붙였다.


“나는 못 해요. 하루에 한 번씩만 이렇게 말해보세요.”


짧은 진료 시간 동안 나를 정확히 진단한 의사의 말에 내심 놀랐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뾰족뾰족 튀어나와 내 머리를 찌르는 느낌을 오래전부터 받아오던 터였다. 반가운 마음에 하마터면 ‘맞아요!’ 하고 맞장구를 칠 뻔했다.


희망을 품고, 못 한다고 접을 수 있는 일이 있는지 가늠해 보았다. 없었다. 결국 나는 의사의 명쾌한 해법을 실행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짧은 순간 내 속에서 희비가 엇갈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의사는 돌아서는 내게 말했다.


“할 수 있어요. 못 한다는 말!”


이상하게도 의사의 눈이 슬퍼 보였다. 그는 분명 나와 같은 과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외치는 주술 같은 말이었다. ‘나는 못 해요!’ 실낱같은 희망으로 자신만을 간절히 바라보는 환자들에게 얼마나 외치고 싶은 말이었을까.


안쓰러운 마음으로 진료실 문을 나섰다. 다음 예약을 잡아주겠다는 간호사에게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오늘 다 치료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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