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에 오페라하우스를 찾았다. 평소는 공연장을 갈 일이 없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냥 하루 대부분을 사업 이야기 속에서 보낸다. 그러다 보니 일은 늘 삶의 중심에 있고, 음악은 자연스레 먼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조금 달랐다.
여성경제인협회 자문위원 자격으로 ‘라 칼라스(La Callas)’ 오페라 공연에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정희경 소프라노가 선보이는 모노 오페라라고 했다.
공연을 보러 간다기보다, 잠시 다른 삶의 결을 만나러 가는 길처럼 그날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범하지 않은 저녁이었다
공연은 저녁 7시 30분이었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했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김밥을 준비해 두었다. 방송에 소개된 음식이라 했다.
한입 먹어 보니 제법 매콤했다. 입안이 얼얼해질 만큼 강한 맛이다.
이상하게도 그 매콤함은 그날 저녁을 또렷하게 깨워 주는 느낌이었다.
마치 오늘 밤 무언가 기억에 남을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공연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여성경제인들이었다.
일반 관객은 따로 예매를 받지 않았다고 했다. 티켓을 받고 나니 시간이 조금 남았다.
협회에서 마련한 이동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받아 들었다. 무료였다.
이 말은 언제 들어도 참 좋다. 마치 짧은 음악처럼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
낮에는 따뜻했는데 밤공기는 제법 차갑다. 커피잔을 손에 쥐고 공연장 앞을 서성였다.
낮 동안 사업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 관객이 된다.
삶이 잠시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이다. 입장 시간이 되어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는 1층 무대 정면 중앙. 공연을 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자리였다. 잠시 후 객석의 불이 서서히 꺼졌다. 무대 위에 빛이 켜졌다. 그리고 정희경 소프라노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첫 대사는 짧았다. “전 노래를 할 운명이고 벗어날 수 없죠. 운명은 운명이죠.”
그 말은 설명이 아니라 고백처럼 들렸다. 아니, 어쩌면 오랜 세월 끝에 내린 삶의 결론 같았다.
그리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화려한 무대는 아니었다. 거대한 장치도, 복잡한 장면 전환도 없었다.
그러나 무대는 조금도 비어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르디와 푸치니의 아리아가 이어졌다. 사실 나는 평소 오페라를 잘 듣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공연이 시작되기 전 마음속 어딘가에는 이런 생각도 있었다.
“혹시 조금 지루하지 않을까.” " 졸리면 어쩌지"
하지만 그 생각은 첫 곡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졌다.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깊고 넓었다.
낮은음에서 시작해 어느 순간 하늘을 향해 치솟듯 올라갔다.
공연장 천장을 밀어 올리는 것 같은 고음이 터졌다.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사람의 몸은 작을 수 있어도, 사람의 삶은 결코 작지 않구나.”
그 목소리에는 기술이 있었다. 감정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크게 느껴진 것은 시간이었다.
수없이 반복했을 연습의 시간. 수없이 흔들렸을 마음의 시간. 어쩌면 포기하고 싶었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긴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이 목소리 안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노래는 단순한 음악으로 들리지 않았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끝까지 밀어 올리며 걸어온 이야기처럼 가슴에 닿았다.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음악을 넘어 하나의 서사처럼 흐르고 있었다.
관객석에서는 중간중간 자연스럽게 박수가 터졌고,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졸음은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오페라는 지루하다는 오래된 편견이 그 자리에서 조용히 무너졌다. 참 신기한 일이다.
대중가요와 오페라는 결국 같은 음악이지만, 처음에는 서로 다른 언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그 낯선 언어 속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길을 찾았다.
머리는 맑아지고, 가슴은 잔잔하게 데워졌다. 마치 오래된 문 하나가 조용히 열리는 순간처럼.
연약해 보이는 한 사람이 무대 위에 서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는 목소리는 공연장을 가득 채운다.
벽과 천장, 공기까지 흔든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사람의 힘은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누군가는 그것을 재능이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노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그것은 하나로 합쳐진다.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이 끝났을 때 객석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곧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 역시 손바닥이 아플 때까지 박수를 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음악은 이미 끝났는데도 마음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흔히 운명을 거창한 말로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운명은 아주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노래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일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삶 자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평생 그 운명을 피해 다니며 살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운명 앞에 멈춰서 말한다.
“그래, 이 길이 내 몫이라면 걸어가 보겠다.”
그날 밤무대 위에서 울리던 목소리는 바로 그런 사람의 것이었다.
삶이 던져 준 몫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바로 그런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돌아와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내가 해야 할 운명과 얼마나 가까이 서 있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