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속 개그맨으로 살기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by 글이로

나는 예능보다 다큐나 역사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무언가 남는 것이 있어서다. 반면 요즘 방송을 보면 예능이나 음식, 트로트, 부부 문제 같은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시청률을 의식해서인지 자극적이거나 감각적인 소재가 많은데, 그런 프로그램엔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아내는 개그맨 부부가 나오는 예능을 즐겨본다.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으면, TV 속 부부가 장난을 치며 깔깔 웃는 장면에 아내는 눈길을 떼지 못한다. 그러다 슬며시 내 눈치를 살핀다.

여보, 우리도 저렇게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밥을 씹다 말고 나는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말했다.

“우린 방송 안 하잖아.”

그 말에 아내는 픽 웃었다. 말은 농담이었지만, 그 말에 담긴 진심을 아내도 느꼈을까.


물론 나도 안다. TV 속 웃음이 다가 아니라는 걸. 카메라가 돌아갈 땐 유쾌해 보여도, 그 뒤엔 피로와 고단함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편집을 통해 더 밝고 재밌게 보이기도 할 테고. 하지만 아내의 질문은 꼭 예능처럼 살자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도 조금은 웃을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었겠지.


생각해 보면, 예전엔 그런 순간들도 있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 아내가 하루 종일 살림에 치여 지쳐 있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내가 급히 냄비 뚜껑을 머리에 쓰고 검은 봉지를 두르고 거실을 활보했다.

아빠는 무적의 기사다! 공주님, 우리를 괴물로부터 지키자!”

아이는 바로 웃기 시작했고, 부엌에서 타는 냄새를 맡고 뛰어나온 아내는 그 광경을 보고 웃음과 당황이 뒤섞인 얼굴로 서 있었다. 그날 밥은 탔고, 설거지는 두 배였지만, 온 집안에 퍼진 웃음 덕에 하루가 참 따뜻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결코 그런 날만 있었던 건 아니다. 다음 날엔 아이가 열이 나 응급실에 다녀왔고, 며칠 뒤엔 내가 야근에 치여 집에 얼굴 비추기도 힘들었다. 말 한마디 없이 지나간 날이 훨씬 많았고, 웃음은커녕 서로의 눈도 마주치지 못한 날도 있었다.


사는 게 그렇다. 누구나 항상 웃으며 살 수는 없다. 누군가를 웃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오늘 하루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웃음은 많을수록 좋지만, 억지로 꺼내 쓰는 게 아니라 서로를 위해 조금씩 내어주는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요즘 나는 아내가 예능을 볼 때 옆에 나란히 앉는다. TV 속 부부가 알콩달콩 장난치는 장면에 아내가 부러운 눈빛을 보내도 괜히 부정하지 않는다. 가끔은 내가 먼저 장난을 건다. 냉장고 문을 열다가 웃긴 표정을 지어 보인다든지, 손에 수세미를 들고 마이크인 척 노래를 불러 본다든지. 그러다 아내가 '푸흐' 하고 웃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연애할 땐 나도 제법 유머 있는 사람이었다. 아내를 웃기고 싶어서 억지로라도 농담을 지어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조용해졌다. 말도 조심하게 되고, 유머도 ‘아재 개그’라며 괜히 눈치 보게 된다. 내성적인 성격 탓도 있겠지만, 세월이 나를 짐 지고 딱딱하게 만든 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래도, 인생은 한 번뿐이다.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건 틀림없는 진리다. 대단한 이벤트나 유쾌한 여행이 없어도 좋다. 오늘 하루, 누군가를 위해 한 번 웃어주는 일.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우리 집은 방송을 하지 않지만, 나에겐 중요한 역할이 하나 있다. ‘우리 집 전속 개그맨’. 출연료는 없다. 아내의 웃음이 바로 내 월급이다. 그리고 그 월급, 어쩌다 쌍으로 터지는 날이면, 아무리 퇴근길이 막혀도 인생이란 드라마, 꽤 괜찮은 코미디가 된다.


편성표에 없는 방송. 리모컨 없이 매일 밤 방영되는, 단 하나뿐인 예능. 그 제목은 이렇다.

〈우리 집은 웃음이 산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