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이 먼저 퇴근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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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로

정부대전청사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 나는 마흔 중반의 사무관이었다. 고향 대구를 떠나 낯선 도시에서의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고등학생이라 가족을 데리고 이사 오기도 어려워, 나 혼자 원룸 하나를 얻어 지냈다. 쓸쓸했지만, 공직자라면 한 번쯤은 겪는 여정이라 생각하며 묵묵히 받아들였다.


첫 출근 날,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환영 인사를 마친 뒤 직원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과장이 좀 별나대요. 돌아이 기질도 있답니다.” 가볍게 들으려 했지만, 마음 한편에 불안이 자리 잡았다. 조직에서 상사를 잘 만나야 복이라는 말, 그건 괜한 말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은 터졌다. 늦은 밤, “지금 즉시 전원 사무실로 복귀할 것.” 비상 문자 한 통이 날아들었다. 감짝 놀란 직원들이 부리나케 사무실로 모였다. 다들 ‘무슨 일이 난 걸까’ 긴장된 얼굴이었다. 하지만 과장이 입을 열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과장이 아직 퇴근 안 했는데, 직원들이 다 퇴근했더라고요.”

그게 전부였다. 사실 나도 그날 밤 8시까지는 남아 일하고 퇴근했고, 과장 역시 그 무렵 자리를 비웠던 걸로 기억했다. 그런데 다시 들어온 그는, 텅 빈 사무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시킬 일이 있었는데’ 직원들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 모두를 다시 불러들인 것이었다. 한참동안 씩씩거리며 고함을 쏟아낸 뒤, 정작 본인은 다시 퇴근해버렸다. 참으로 권위적인, 비상 상황보다 더 당황스러운 ‘비상근무’였다.

우리는 잠자리에 들려다 벌떡 일어나 사무실로 돌아온 ‘이유 없는 이유’ 앞에서, 망연히 앉아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사람들과 눈을 맞출 때마다 어딘가 씁쓸한 기색이 스며있었다.


그 후로 2년쯤 흘렀다. 사회적 체면상 ‘그 분’이라 하기도 꺼려지는 그 양반이 명예퇴직을 하고 산하기관의 기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관의 예산 편성 권한이 내게 있었다. 입장이 바뀐 것이다. 이제 그는 자주 직원들을 통해 나를 찾았다.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겸손한 말투, 낮은 자세. 나는 늘 “검토 해 보겠습니다.” 하고 웃으며 응대했지만, 돌아서면 어깨가 절로 흔들려 졌다. ‘사람이 참 쉽게 변하는구나.’ 그렇게 직원들을 몰아붙이던 사람이 자신의 과거는 잊은 듯 카멜레온처럼 몸 색깔을 바꾸는 모습이 참으로 씁쓸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자녀 결혼식 청첩장이 도착했다. 전 직원에게도 뿌린 듯했지만, 나중에 들으니 아무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나 역시 가지 않았다. 그건 단순한 보복이 아니었다. 사람 사이엔 계산서가 없는 것 같아도,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법이다. 그의 곁에 사람이 남지 않은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조용한 답이었다.


본부 근무를 마치고, 대구 산격동 경북도청에 파견되었다. 그곳에서는 세 분의 과장님을 만났다. 세 분 모두 인품이 훌륭하셨고, 팀장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스스로는 한 발 물러나 조율만 하셨다. 자율적이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나도 팀원들과 신나게,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참 고마운 분들이다.

돌이켜보면 지극히 권위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았던 양반(?)들은 더 많았지만 다 지나간 과거일 뿐.


시간이 흘러 나 역시 과장으로 승진했다. 나는 그때 다짐했다. ‘절대 그런 사람처럼 권위적이지 않겠다.’ 가장 먼저 출근했고, 누구보다 먼저 퇴근했다. 팀원들에게는 최대한의 자율성을 주었고, 감시보다 신뢰를 택했다.


요즘은 오히려 과장이 직원 눈치를 본다는 말도 들린다. 웃어넘기기엔, 그 말 속에 담긴 변화가 참 큰듯 하다. 세월이 조직 문화를 바꾼 것이다. 권위란 목소리로 세우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으로 쌓아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지식이 아무리 많고, 능력이 뛰어나도 인성이 부족하면 그 권위는 오래가지 못한다. 뿌리가 얕은 나무가 큰 바람에 먼저 쓰러지는 법이다.


나는 그 시절의 아픈 기억을 밑거름 삼아 살아간다. 그리고 내 자식들에게도 꼭 말해준다. “누군가에게 던지는 작은 권위도, 결국은 너에게 돌아온단다.”


격세지감. 세월은 참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타산지석. 남의 부족함조차 내 거울이 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그 두 단어를 가슴속에 새기며 내 마음의 모서리를 다시 깎는다. 내가 겪은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조용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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