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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로

서랍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만난 비디오테이프 하나. 라벨에는 ‘결혼식’이라 적혀 있었지만, 글씨가 반쯤 지워져 ‘결’만 남아 있었다.

처음엔 무슨 테이프인지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워낙 오래돼서 VHS가 뭔지조차 모를 조카들 세대다. 어쩌면 이건 세월이 남긴 ‘화석’ 같은 물건일지도. 괜히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 그래도 궁금했다. 저 안에 있는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나와 한번쯤 마주하고 싶었다.


전문 업체에 맡겨 디지털로 복원하기로 했다. 열흘이나 걸려 도착한 파일을 컴퓨터에 띄우고, 마우스를 조심스레 클릭했다. 화면에 큼지막하게 떠오른 ‘結婚式’라는 글자. 갑자기 촌스러운 BGM이 울려 퍼지며 영상이 시작되었다. 한때는 ‘최첨단’이었을 예식장의 외관이, 지금 보니 시대극 세트장 같았다. 그 낡은 건물 안으로 카메라가 천천히 들어가고, 화면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처음엔 낯선 얼굴 같았는데, 조금 지나니 알겠다. 지금의 아내였다. 아니, 그때의 아내. 수줍은 듯한 눈빛, 약간 떨리는 미소. 아, 그 시절엔 정말이지... 그렇게 예뻤다.


그리고 다음 장면, 드디어 신랑 등장. 화사한 조명 아래, 다소 어설픈 정장 차림에 잔뜩 긴장한 표정.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그 얼굴. 그래, 그게 나였다. 지금의 나보다 머리숱은 확실히 풍성했고, 턱선은 왜 저리 날렵한지. 어깨는 조금 들떠 있고, 눈빛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흐른다. 저 땐 몰랐다. 인생이란 게 얼마나 허리와 무릎을 시험에 들게 할지. 영상 속의 나는 아직 세상이 만만했던 시절이었다.


가족들이 하나둘 화면에 등장했다. 접수대에서 축의금을 받는 사촌형,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는 어머니, 손님들에게 연신 허리 숙이던 아버지, 영상 속에선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종종걸음치고 있었다. 지금은 하늘에 계신 두 분이지만, 그날만큼은 분명히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땐 몰랐다. 부모님의 등도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는 걸. 그날의 북적임 속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따뜻함이 있었다.


신랑 입장! 내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어깨를 쫙 펴고, 조금은 굳은 걸음으로 걸어 들어온다. 지금 보면 꽤 웃긴데, 그때의 나는 정말 진지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전장의 군인처럼 비장했다. 이윽고 신부 입장이 이어지고, 드레스를 입은 아내가 들어온다. 그 눈빛, 지금은 보기 힘든 순수한 반짝임이었다. 드레스 디자인은 촌스러웠지만, 그 시대엔 그게 최고 유행이었다. 지금 입으면 아마 복고파티 우승감이겠지만, 그래도 정겨웠다.


주례사는 참 길었다. 무려 17분 46초. 그중 절반은 ‘인생이란 무엇인가’였다. 젊은 우리는 긴장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고, 친구들은 뒤에서 하품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손을 꼭 잡고 서 있었다. 서로의 손에 묵직한 미래가 걸려 있었기에. 어색했지만, 그 순간만은 진심이었다.


폐백 장면도 등장했다. 절하는 내 모습이 마치 요가 수련생처럼 부자연스럽다. 그래도 어른들 앞에 서툰 모습 그대로 절을 올리는 것이 예의였다. 그러고 보면, 예의란 결국 진심을 담는 일이었는지도. 영상엔 웃으며 절받는 장인어른, 조카에게 과일을 몰래 쥐어주는 큰아버지, 그 시절의 활기찬 우리 일가친척들이 다 모여 있었다. 지금은 각자의 삶에 흩어져 살지만, 영상 속에서는 여전히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마지막 장면, 누가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흐린 하늘 위로 해가 뜨는 컷으로 끝난다. 그 시절 누군가는 꽤 감성적인 편집을 했던 모양이다. 그 장면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울컥했다. 그렇게 오래됐지만, 그날은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주름이 없었고, 걱정도 덜했으며, 설렘은 매일같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더 느리게 걷고, 더 자주 쉬며, 아침마다 허리를 두드린다. 하지만 그 영상을 보고 난 후로, 거울 앞에 선 내 얼굴에서도 어렴풋이 그 청년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시절의 나는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젊음은 사라진 게 아니라, 가끔 꺼내보아야만 다시 떠오르는 별 같았다.


언젠가 손주에게 이 영상을 보여주면 뭐라 할까. “할아버지, 왜 이렇게 수줍어해요?” 하고 웃겠지. 그러면 나는 웃으며 말할 거다. “그땐 처음이라 그랬단다. 인생도, 사랑도, 다 처음이라서.” 그렇게 한 편의 오래된 테이프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테이프 속의 신랑과 신부는 오늘도 함께 밥을 먹고, 서로를 잔소리하며, 나란히 늙어가고 있다.

고맙고, 참 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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