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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머리 초등학교 시절, 새 학기 첫날
새 교과서를 받는 날이다.
바짝 긴장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새 교과서의 첫 장을 펼친다. 그 순간 잉크와 종이가 어우러진 독특한 향이 코 끝을 간질인다. 가슴속까지 깊이 스며들며 설레기까지 했다.
돌이켜보면, 그 향은 세상 어디에서도 맡을 수 없는, 단정하고 순진한 냄새였다. 엄마가 "공부 열심히 해" 하시며 사주신 스펀지 깔린 필통 안에 연필을 가지런히 세운다. 지우개도 필통 귀퉁이에 조심스레 넣었다. 그 동작은 마치 하나의 작은 의식처럼 조심스러웠다.
새 학기의 봄은, 그렇게 냄새로 다가왔고 나는, 그 향기를 맡으며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냄새는 단순한 종이 냄새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자, 설렘의 정체였다.
그러나 계절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냄새는 점점 멀어졌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을 지나, 대학생이 된 어느 날부터는 책의 냄새 대신 진한 커피 향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책은 더 이상 기다려지는 무엇이 아니라, 그저 ‘해야 할 일’이거나, '미뤄둔 일'로 변해갔다. 자연스레 책 보다 커피를 더 자주 손에 쥐게 되었고, 책장을 펼치는 시간보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 얼마 전, 헌책방에서 우연히 꺼낸 낡은 책 한 권에서 잊고 있던 냄새를 다시 만났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색이 바랜 책을 넘기다 보니 마치 오래된 친구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나도 한때는 새 책이었지.”
문득 깨달았다. 책 냄새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었고, 그것은 더 이상 ‘새로움’의 향기가 아닌, ‘기억’과 ‘시간’이 녹아든 냄새로 변해 있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따뜻한 커피 향과 낡은 책장 사이 어딘가에서 조용히 나의 시간을 읽고 있다.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지 않더라도, 그 익숙한 냄새 하나로 마음 한편이 봄처럼 환해지기도 한다.
책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냄새는 여전히 기억 속에 살아 있으며, 다만 그것을 꺼내 드는 방식만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 따뜻한 향은 어느새 향수鄕愁가 되었고, 그래서 지금의 나는, 커피 향과 헌책 냄새 사이에서 다시 한번 조용히 나의 시간을 읽어 내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