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팔 세 장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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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로

주말 아침은 언제나 느긋하다. 창밖으로는 햇빛이 반쯤 걸터앉고,

식탁 위에는 아내가 내어준 따뜻한 커피가 김을 뿜고 있다.

나는 리모컨을 손에 쥐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아무 생각 없이 화면을 훑는다.

그리고 그 순간—그놈이 또 왔다.

지름신.


반팔 티셔츠 세 장, 그것도 깔 맞춤으로 잘도 진열해놨다.

한여름을 겨냥한 상큼한 민트색, 깔끔한 아이보리, 시원해 보이는 네이비.

"여름에는 이런 원단이 필수죠!", "이 가격에 이 퀄리티? 오늘만 이 가격!"

아니, 이건 누가 안 산다고 해도 이상할 일 아닌가? 결국 나는 속절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이 장면, 처음은 아니다. 심지어 나보다 먼저 이 장면을 예견하는 이가 있다.

"또 샀구나."

아내의 짧은 말 한마디. 감정도, 기대도, 체념도 섞인 듯한 그 말.

옷장을 열면 그제야 깨닫는다. 색깔만 조금 다를 뿐,

어깨선이며 넥라인이 거의 비슷한 옷들이 주루룩 걸려 있다.


"이 옷은 작년 여름에 산 거고, 이건 재작년, 저건 봄 맞이 할인 행사 때..."

기억은 또렷하다. 문제는 그 기억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문득 오래전, 일본 여행 중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기 사람들은 여러 개의 저렴한 물건을 사는 대신, 품질 좋은 걸 하나 사요.”

그 말이 그땐 참 새로웠다.

저가의 물건을 여러 번 사서 결국 돈을 더 쓰게 되는 나와는 달랐다.

그들은 기다리고, 고르고, 꼭 필요한 것을 사더라. 그러니 옷도, 가방도 오래 간직한다.

물건에 대한 애정이 진득하게 남는다.


그에 비해 나는 어땠나.

순간의 충동에 이끌려, 방송 속 말솜씨에 혹해, 또 한 번 구매 버튼을 눌렀다.

어쩌면 그 말솜씨 속에는 ‘당신도 누릴 자격 있다’는 은근한 위로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엔 진짜 꼭 필요한 것만 사야지."

이 말을 몇 번 했는지, 세는 것도 포기했다.


하지만 오늘만은 조금 다르다. 티셔츠를 받아든 순간, 스르르 한 장을 꺼내 아내에게 건넸다.

"당신한텐 이 색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아내는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말없이 티셔츠를 받아들고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꼭 합리적인 소비만이 정답은 아닌 것 같다.

때로는 누군가를 웃게 만드는 사소한 소비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스스로 합리화를 해본다.

물론, 오늘도 옷을 받아 들며 또 다짐을 했다.

"다음엔 정말 필요한 것만 사자."

근데 솔직히 말해서, 이 다짐도 얼마나 갈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지름신이 언제 다시 올지 자신이 없거든.

그래도,

그때는 진짜 마음에 쏙 드는 옷 딱 한 벌만 사는 걸로—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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