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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가 아직 덜 깨어 있을 즈음, 베란다 문을 살짝 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귤나무가 보고 싶었다. 얼마 전부터 초록 잎이 힘차게 퍼져가는 걸 보며 괜히 나도 살아 있는 기분이 들어서, 아침 마다 꼭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잎사귀 틈새에서 작고 하얀 꽃들이 피어 있었다. 한두 송이가 아니었다. 이게 뭐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코를 가져다 댔다. 순간, 너무 맑고 깊은 향이 확 퍼졌다. 숨을 들이쉬었는데, 그 향이 목을 타고 그대로 마음속까지 흘러들었다. 인위적인 조미료 같은 것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오직 자연만이 낼 수 있는 향. 그래서 더 강렬했다. 뭐랄까, 꾸미지 않은 사람의 진짜 웃음 같다고 할까? 표현하려고 애쓸수록 그 향은 더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이 향을 병에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요즘 세상은 너무 시끄럽고, 공기조차 버거울 때가 많다. 도시 냄새에 익숙해진 코가 이 향을 맡고 놀랄 정도면, 이건 분명히 특별한 것이다. 그저 꽃이 피었을 뿐인데, 세상이 잠시 맑아진 그런 느낌이었다. 만약 이 작은 귤나무의 꽃향기를 담을 수만 있다면, 그 맑음을 병에 담아 꺼내 쓰고 싶었다.
그런데 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말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서 조용히 피어 있을 뿐이다. 누가 봐주든 말든, 그냥 있는 그대로. 사실, 그런 게 더 멋있는 거 아닐까?
곧 이 꽃도 지겠지. 그리고 그 자리에 조그맣고 단단한 초록 귤이 열릴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그 귤도 노랗게 익겠고, 손으로 따서 맛 볼 날도 오겠지. 그 모든 걸 생각하니, 지금 이 조용한 순간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졌다.
요즘은 뭘 하든 ‘보여 줘야한다’는 압박 속에 살고 있다. SNS에 올릴 사진, 설명할 말들, 누군가에게 설명을 해야 살아 갈 수 있다는 느낌. 그런데 이 귤꽃은 아무 말 없이 그냥 피어 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가치가 있다는 걸 그 꽃이 먼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오늘은 그냥 조용히 있었다. 핸드폰도 안 들고, 사진도 안 찍고, 그냥 향을 맡았다. 그렇게 피어난 꽃 앞에서, 나도 조금은 가만히 살아보고 싶어졌다. 균형을 잃지 않는 삶, 말보다는 향기로, 증명보다는 존재로. 이 아침, 귤꽃이 가르쳐준 가장 진짜 같은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