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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돌 기자 Jan 28. 2022

노숙자와 소주

술과 뗄 수 없는 그들

얼마 전 볼일이 있어서 서울남부지방법원 등기국에 갔다 오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서 영등포역 뒤쪽 샛길로 가게 됐다. 지도상으로는 영등포 뒤편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인데 막상 가고보니 길이 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노숙자가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영등포는 독특한 동네다. 여의도 근처에 있는 서울 중심지이자, 번화가이자, 개발이 되고 있는 지역인데 또 공업단지, 사창가, 불법 게임방, 노숙자들이 있는 어찌보면 할렘가스러운 분위기가 있는 동네기도 하다. 그곳도 영등포지만 어딘가 영등포스럽지 않은, 그런데도 영등포인 장소였다. 다 허물어져 가는 오래된 슈퍼에는 '월셋방 있읍니다'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잔뜩 쫄아서 노숙자 무리를 지나치려는데 한 노숙자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늘상 있는 일인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나는 이 동네에 나타나기엔 지나치게 차려입은 행색이었다. 노숙자들은 낮 12시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색이 바래진 옷을 여러겹 껴입고 구멍이 뚫인 장갑을 낀 차림이 초라한 남성 서넛이 소주 여덟병 쯤은 옆에 두고 과자를 안주 삼아서 낮술을 마셨다. 술 마신 노숙자는 왠지 위협적이지만, 낮술을 마신 노숙자는 위험한 느낌보다는 이상하게 친근한 느낌이 강했다. 그는 어떤 적의 없이 순수한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조금 더 길을 걸으려는데 공중 화장실이 나왔다. 작은 손수레를 끈 나이든 여성 노숙자가 화장실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한참을 두리번 거리는데 소주를 마셨는지 코가 빨개진 남성 노숙자가 내 앞길을 막았다.


거기 길 아닌데

내게 길을 알려주려 작정한 말투였다. 네이버 지도를 찾으면 금세 나왔겠지만, 호의가 나쁘지 않아 되물었다. "그럼 어딘데요?"  노숙자는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영등포역이라고 답하자, 그는 모퉁이를 뺑 돌면 나온다고 친절한 말투로,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주려 애썼다. 노숙자의 안내에 길을 다시 잡고 모퉁이를 돌았는데, 이번엔 긴 줄이 나왔다. 광야교회였다. 광야교회는 노숙자 무료급식 등을 제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들 뭔가를 타기 위해서 줄을 선 것이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여성 노숙자(유모차엔 대부분 짐이 있다), 술을 마시고 있는 남성 노숙자 등. 그들의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광야교회 맞은편에는 의료원도 하나 있었다. 의료원 입구엔 "술 마시고 오지 말라"는 문구가 있었다. 노숙자와 술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실제로 술에 취해서 잠이 들었다가 동사한 노숙자들이 많다. 보호소도 있긴 하지만, 여력도 없고 또 노숙자들이 몸을 덥히려고 술 먹는 걸 막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면 은근한 취기와 함께 체온이 오르는데 밖에 있으면 몸이 어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술을 안 마실 수는 없다. 노숙자들 사이에선 술을 마시지 않으면 대화에 제대로 껴주지도 않는다. 텃세를 부리는 노숙자들은 이제 막 온 노숙자들에게 술 심부름도 시킨다. 노숙자의 서열과 문화를 지키는 중심에는 술이 있다. 그래서인지 노숙자들이 몰려 있는 역 주변이나 광장 등에는 오래된 슈퍼, 포장마차 등 소주를 싸게 파는 곳들이 많다.

요즘에야 쉼터도 잘 되어 있고 자리도 많아 싸움날 일이 줄었다지만, 간혹 역 주변에선 소주병을 들고 싸우는 노숙자들을 왕왕 볼 수 있었다. 술 기운도 돌아겠다,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격해지게 된다. 어떤 정치인은 노숙자들을 다 제거해야 한다며 뿌리를 뽑겠다고 모두 몰아낸 적도 있었지만, 잠깐 뿐이다. 노숙자들은 또 다시 자연스럽게 술병과 함께 춥지만, 그중에서도 몸을 누일 수 있는 따뜻한 곳을 찾아 자리를 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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