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돈과 사회적 약자
기사가 택시에서 내린 후 길가 언덕으로 올라간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가겠다고 한다. 식당도 인가도 없는 외딴곳이 인데. 기가 막힌다. 곧 막차가 떠날 텐데. 마음이 조마조마한 내게 기사가 웃돈을 올려 달라고 한다.
못 주겠다며 나는 택시가 지나온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자동차들이 몇 대 쌩쌩 지나간다. 택시는 없고. 맘이 급해진다. 한 밤 중에 인가도 없는 시골길에서 어떡할 것인가.
마침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온다. 승용차의 문을 두드린다. 승용차가 선다. 운전자가 문을 열고 내다본다. 내 사정을 말한다. 한 사람 비집고 탈 공간이 보인다. 운전자가 내게 타라고 하는 순간 승용차 안에서 불평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운전자가 미안하다며 차를 몰고 가버린다.
시외버스 타기 글렀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데. 눈이 번쩍 떠진다. 꿈이었다. '웃돈을 주고라도 택시를 타야 했나'라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마음이 얼얼하다. 꿈이었을 뿐인데.
12시가 되기 전에 글을 못 올릴까 조바심을 내던 내 마음이 반영된 꿈이다. 그것이 시외버스 타는 것으로 바뀐 것뿐이다. 잠자리에 누운 채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웃돈을 주고 택시를 타고 가야 했나.'라는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누운 채로 휴대폰을 치켜들고 방금 꾼 꿈을 적었다.
오늘의 화두는 '웃돈을 주고라도 택시를 타야 했나'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적혀있다. 첫째는 본래의 값에 덧붙이는 돈이고 둘째는 물건을 서로 바꿀 때에 값이 적은 쪽에서 물건 외에 더 보태어 주는 돈이다.
꿈속에서 택시를 탔을 때처럼 무슨 웃돈을 치르지 않아 헤매고 있는 것일까. 내가 치르지 않은 웃돈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치러야 하는 웃돈은 어떤 것일까. 그 웃돈을 치르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수 있을까. 인터넷 검색창에 '웃돈'이라고 쳐본다. 웃돈들이 주르르 떠오른다.
계열사에 웃돈을 준 ㅇㅇㅇㅇㅇ.
트램 노선 따라 웃돈 형성.
"신차 기다리가 지쳤어요."... 웃돈에 중고시장까지 기웃.
시신 본국 소환 웃돈 요구까지... 두 번 우는 유족들.
물건을 서로 바꿀 때 값이 적은 쪽이 돈을 더 얹어주는 것이 정당하지만, 문제는 본래의 값에 덧붙이는 돈에서 발생한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수수료를 많이 달라고 해서 민원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매수자나 매도자가 스스로 중개인에게 웃돈을 얹어주는 일도 있다고 한다.
매도자는 급매를 했을 경우고. 매수자는 좋은 물건을 싸게 샀을 경우이다. 내가 중개인이라도 수수료 외에 웃돈을 얹어주는 매수자에게 먼저 좋은 물건을 소개할 것 같다. 이 경우는 웃돈을 더 주더라도 매수자에게 이득이 되지 손해 나는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웃돈과 관련된 더 큰 문제는 약자의 약점을 이용해서 웃돈을 요구하는 경우다. 꿈속에서 택시기사가 늦은 밤 다른 교통편이 없는, 내 약점을 이용하여 웃돈을 요구한 것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택시기사의 요구에 따라 웃돈을 더 주고 타고 가는 것이 내게 더 나은 일일 수 있다.
막차를 타면 집에 갈 수 있는데. 시골길에서 다른 교통편을 마련하지 못하여 막차를 놓쳤을 경우에는 얼마나 큰 낭패인가. 꿈이었으니, 다행이었다.
현실이었다면 웃돈을 주고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정류장으로 갔을 것이다. 여자인 내가 어떻게 인가도 없는 시골길에서 웃돈을 안 주겠다고 버틸 수 있겠는가.
사회적 약자의 종류에는 신체적 정신적 약자. 권력적 약자. 경제적 약자. 문화적 약자가 있고. 여성뿐만 아니라, 장애인, 노인, 이주노동자. 임산부, 성소수자. 어린이 등이 포함된다
이 분류는 인간 중심의 분류다. 즉 사회적 약자는 모두 호모사피엔스, 사람뿐이다.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이렇게 분류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함께 행복하게 살자는 것 아닌가.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사람만이 사는 것이 아니다. 애완동물이었다가 반려동물이 된 개가 있고 고양이가 있다. 가축으로 사육되는 소와 돼지와 오리와 양과 닭들이 있다. 가축이라 불리는 이 생명들은 사회적 약생명 중의 약생명이다. 이 약생명들이 겪는 고난과 고통을 여기서 일일이 말할 수는 없다.
지금 지구는 위기에 처해있다. 사람들은 처음엔 '지구온난화'란 용어를 쓰다가 '기후변화'로 말을 바꾸었다. 지금은 또 '기후위기'에서 기후재앙으로까지 바뀌었다. 같은 상황인데, 기후위기란 말보다 기후재앙이란 말이 더 위기감이 느껴진다.
가축이라 불리는 약생명의 고통을 줄이려면 그들의 고통을 무어라 명명해야 될까. 인간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도 아쉬운 상황이라. 뒤로 밀려나고 마는 약생명들의 고통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웃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사회적 약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회적 약자들은 웃돈을 낼 수 없어서 사회적 약자가 되었다.
소돼지도 가랑잎으로 굴러도 이생이 좋아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 소돼지들이 웃돈을 내놓을 수 있다면 어떻게 인간에게 가죽과 고깃덩어리와 뼛조각까지 탈탈 털리겠는가. 인간들. 가죽과 고깃덩어리와 뼛조각 사이사이 스며있는 목숨.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 간다.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이 따로 없다. 이들 소돼지 약생명들이 우리 인간을 향해 '우리를 죽이지 말라.' '우리의 생명은 우리 것이다.'라고 촛불을 든다면 당신은 어디에 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