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고사
동네 친구랑 숙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엄마가 이불 홑청에 먹일 풀을 연탄불 위에 올려놓고 저어라고 했다. 내가 풀을 저으려고 할 때 친구가 제안했다. 친구가 풀을 저어주겠다고. 그 대신 숙제를 해달라고.
나는 친구 숙제를 하고 친구는 연탄불 위의 풀을 저었다. 친구가 풀을 제대로 젓지 않아서 냄비 바닥에 풀이 꺼멓게 눌어붙었다. 엄마가 탄 냄비를 씻고 다시 풀을 끓였다.
그때 난 친구 숙제를 해주는 것이 하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내겐 친구 숙제를 대신해 주면 안 된다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또 잘못된 행동이었는데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일이 하나 더 있다. 내가 국민학교 땐 일제고사라고 하여 전교생이 같은 날 시험을 쳤다.
커닝을 막기 위해서 짝꿍끼리 한 아이는 걸상에 앉아서 책상 위에서 시험을 치고 한 아이는 바닥에 앉아서 걸상을 책상 삼아 시험을 쳤다.
내 짝꿍의 아버지는 육성회 회장 즉 학부모 회장이었다. 짝꿍은 학교에서 잘 나가는 애였다. 나는 변두리에 사는 소심한 아이였다. 어느 날 짝꿍이 내게 말했다.
일제고사를 칠 때 자기가 모르는 문제 번호를 지우개에 적어 주면 뒷면에 정답을 적어달라고 했다. 일제고삿날 짝꿍이 지우개에 번호를 써서 내게 주었다. 짝꿍이 번호를 써 줄 때마다 정답 번호를 써서 그 애에게 지우개를 돌려주었다.
다음번 일제고사에서였다. 짝꿍이 내게 산수문제 번호를 지우개에 적어서 줬다. 짝꿍이 준 지우개에 정답이 14.5 같은 소수점이 있는 숫자를 적어 짝꿍에게 보냈다. 짝꿍이 선생님 몰래 소수점이 없다라고 자꾸 우겼다. 그래서 나는 소수점 아래 숫자를 지우고 14라고 썼다.
선생님이 채점한 시험지를 나눠주셨을 때 보니 짝꿍의 시험지에는 14.5가 적혀있었다. 정답은 14.5 같은 소수점이 있는 숫자였다. 나는 그 문제를 틀렸고 짝꿍은 맞았다.
내가 정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짝꿍이 자꾸 우겨서 내가 넘어간 것이었다. 그 뒤엔 일제고사 때 짝꿍이 내게 지우개에 번호를 써서 주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번호를 써주더라도 내가 정답을 써주진 않았을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 우연히 이 일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커닝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아이는 책상 위에서 한 아이는 걸상 위에서 시험을 쳤는데. 나는 왜 선생님 몰래 지우개에 정답을 써서 짝꿍에게 건네주었을까.
내가 다른 사람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그랬을까. 혹은 정말 하면 안 되는 일인 것을 인식하지 못했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 애의 기세에 눌려서 그랬을까. 생각 중이다.
그리고 짝꿍은 내게 왜 산수문제의 답을 14라고 우겼는지 그리고 저는 왜 14.5라고 썼는지 물어보지도 못한 나에 대해 생각 중이다.
내가 어리숙해서 이용당한 사건이지만. 내가 해도 되는 행동과 하면 안 되는 행동을 구분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