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인의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책장에는 시집이 여러 권 있다. 시집들은 모두 오래전에 산 것이라 색이 누렇게 바래가고 있다. 책장을 정리할 때마다,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하며 보관해 온 것이다. 요즘 다시 꺼내 읽는 읽는데, 시의 풍미가 예전보가 깊고 그윽하다. 시집의 색깔이 바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좀 숙성이 되었나 보다.
햇솜 같은 아이가 예처럼 손이 굵어지는 동안
마치 큰 징이 한 번 그러나 오래 울렸다고나 할까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들
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을 것들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이 사이
이 사이를 오로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글은 문태준 시인의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의 일부분이다. 이 시 중에서 내게 울림으로 다가온 구절은 마치 큰 징이 한 번 그러나 오래 울렸다고나 할까 와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이 사이 이 사이를 오로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이다.
내 삶의 징이 한 번 오래 울렸나 보다. 징 치는 소리를 들은 것이 어제 같은데. 대여섯 살의 나는 어디로 사라지고, 70살의 내가 여기 있다. 스무 살의 나를, 마흔 살의 나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나는 어디에 가있을까? 징 한 번 울리는 사이, 살구꽃은 수십 번 피고 졌을 것이고 푸른 살구 열매도 수십 번 맺혔다가 떨어졌을 것이다.
내 삶의 살구나무 가지엔 푸른 살구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 꽃을 아직 못 피운 것이 분명하다. 꽃을 피웠다면 쌀알만 한 푸른 살구 열매라도 달려있을 것이고, 태풍이나 비바람에 떨어진 것이라도 있을 것인데. 징 길게 울리는 사이 나는 무얼 하며 시간을 흘러 보냈을까. 무얼 하긴 했을까.
눈에 뵈지 않은 먼지도 쌓이면 잘 보이는 것처럼. 내가 보낸 시간은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있겠지. 내가 시간이 쌓인 곳을 찾기만 하면 볼 수 있을 텐데. 나는 시간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내가 찾아가는 흔적은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일까. 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는 것일까. 살구의 푸른 열매는 살구나무가 떡잎을 냈다는 흔적이고 가지를 뻗고 잎사귀를 냈다는 흔적이다. 꽃이 피었다 졌다는 흔적이다. 내 삶의 가지에 살구 푸른 열매가 없는 것이 내겐 꽃이 피었다 진 적이 없다는 흔적일까. 무엇이 없었다는 흔적도 있는 것일까.
꽃이 피고 진 흔적이 없는 내 살구나무에 흰머리 카락이 자라고 있다. 흰머리카락은 어떤 꽃을 피울까? 어떤 열매를 맺을까. 이전에 있었던 어떤 일의 흔적일까. 내가 만질 수 없었던 일과 내가 만질 수 없을 일들 사이, 어딘가에서 꽃을 피운 흔적이 이거나 곧 꽃을 피울 거라고 알려주는 기미일까.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그 사이에서 살구나무가 한 번도 꽃을 피운 적이 없었다는 흔적 혹은 앞으로도 꽃이 필 수 없다는 기미는 아나겠지.
내 흰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스며 있는 웃음과 눈물과 실수와 실패를 끌어모아, 한 송이 꽃 피우고 열매 한 알 맺고 싶은데. 흰머리카락이 모자라는 걸까? 하얀 머리카락 개수가 많을수록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사용할 거름인 웃음과 눈물과 실수와 실패가 더 많이 쌓여있을 거니까. 흰 머리카락이 부족한 지금은 꽃 필 때가 아닌 것이다. 흰머리카락이 더 빨리 더 많이 자라나기를 바라도 괜찮을까.
젊을 땐 하얀 머리카락이 하나 올라오면 즉시 뽑아버렸다. 언제나 청춘일 것처럼 머리카락처럼 하찮게 여긴 것들, 좀 많았겠나. 아직 내 살구나무에 살구 푸른 열매가 달리지 않은 이유가 내가 하찮게 여긴 것이 많아서인가 돌아보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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