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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수 Aug 30. 2024

잘 데워진 밥 같은 생!

시를 읽고 쓰다(그루터기. 김기택)

그동안 시를 읽고 글을 썼습니다. 

시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목: 잘 데워진 밥 같은 생!

      

지금

분수가 있던 자리에는

키 작은 냄비 같은 연못이 하나 있습니다

                            (그루터기, 김기택)     


김기택 시인의 시 ‘그루터기'를 읽는다. 시어머님이 생각난다. 시댁엔 까맣고 작은 냄비가 있었다. 처음에는 기다란 손잡이 하나가 달린 냄비였을 것이다. 내가 보았을 때는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서 자루 부분의 금속만 남아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에 있는 뜨거운 냄비를 들어 올린 땐 행주로 감싸야했다. 까만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이 냄비를 시어머님은 보물인 듯 아껴 사용했다.   

  

언젠가 간다는 연락도 없이 시댁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시어머님이 식은 밥을 데우는 것을 보았다. 시어머님은 이 까만 냄비에 식은 밥을 넣고 물을 조금 부었다.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다음, 스위치를 이쪽저쪽으로 돌려가며 불 세기를 조절했다. 가스레인지 불이 하도 약해서 곧 꺼질 것 같았지만, 꺼지진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간 후 까만 냄비 속의 물이 끓으면서 솟아오르려고 했을 것이다. 작고 둥근 파문만 일었을 뿐 솟아오르진 못했겠지만, 밥은 아주 천천히 잘 데워졌다.  

    

뿌리의 불꽃을 받아

낮은 파문을 일으키며 끓고 있습니다

솟아오르려고 하지만 작고 동그란 파문만 일어날 뿐 

                                           (그루터기, 김기택)       

        

그루터기와 작고 까만 냄비는 비슷하게 닮았다. 솟아오르지는 못하고 작고 동그란 파문만 일으키는 점에서. 시어머님도 그루터기와 냄비 속의 물과 닮았다. 시어머님도 한때 솟아오르려고 했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꿈 많았던 어린 시절과 자녀들을 키울 때 엄마로서 정말 솟아오르고 싶었을 것이다. 끝내 분수로 솟아오르지 못하고, 끓으며, 끓으며,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다가 한 줌의 재가 되어 사그라들었다.  

    

한때 커다란 분수였던 나무가 그루터기를 남겼듯 시어머님도 무언가를 남겼을 것이다. 나는 시어머니가 남긴 그것을 찾아 나선다. 작고 동그란 파문만 일으키는 그루터기는 이전에 큰 나무였고, 그 이전엔 어린 나무이었듯, 시어머님은 이전에 엄마였다. 엄마이기 전엔 여성이었고 어린아이였고, 무엇보다도 한 인간이었다.      


내가 본 시어머님은 시골 아낙네였다. 엄마였다. 이게 시어머님의 삶의 전부였다. 나는 자식에게 무엇이라도 더 주려는 시어머님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애달팠다.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님이 내게 남긴 것은 한 인간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을 시어머님을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다. 나로 솟아올라 내가 나를 안타깝게 여기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19살일 때도 스무 살 때도 엄마였을 때도  나는 작고 둥근 파문조차 제대로 일으키지 못했다. 노인이 된 지금에서야 소소한 파문을 일으키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나로서 끓어올라 분수처럼 솟아오르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좀 모자라는 것 같다.   

   

밥을 데우는 데는 작은 파문으로 충분했다. 냄비 속의 밥을 데우는 데는 펄펄 끓어 넘치도록 하는 열기는 도리어 밥을 태우고 말 것이다. 내 삶을 데우는데도, 끓어오르는 열정이 필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일상의 자잘한 일이 불꽃이 되어 나를 조금씩 데워 줄 것이다. 그래서 김기택 시인의 그루터기를 읽고 글을 쓰면서, 작은 불꽃 파문 하나를 일으키는 중이다.  꺼질 듯 꺼질 듯하던 가스불이 밥을 데웠듯, 지금 내가 아주 천천히 데워지고 있을 것이다. 아주 잘 데워진 밥 같은 생!        


인용/ 그루터기,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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