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소하지만, 내적 변화를 일으키는 경험

한글교실에서

by 할수 최정희

한글반 노인교육생들이 하지 않게 된 말은 '늙어서' '머리가 나빠서'이다. 이 글은 노인교육생들이 이 말을 하지 않게 만든 세 가지 경험에 대해 쓰려고 한다.


노인교육생들은 앞서 언급한 말들을 자주 했다. 이 말들은 자신이 한글을 잘 배울 수 있다는 믿음이 없어서 나오는 말이다. '늙어서'란 말은 젊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들처럼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머리가 나빠서'란 말은 정말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일 것이다.


이런 핑계를 대는 순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자긍심이 줄어들어, 자신이 못난이로 느껴진다. 노인교육생들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마음이 안 좋았다. 이왕이면 즐겁게 자신감을 가지고 하는 편이 노인교육생에게나 내게도 더 좋다.


이분들에게 가끔 말했다. 늙어서 혹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해 본 적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라고. 열 번 하면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스무 번 해서 배우는 사람이 있다고. 스무 번 해서 안 되면 서른 번 하면 된다고.

"말 잘하시잖아요? 얼마나 오래 해 오셨어요?"

"수십 년 해왔죠."

"글자를 배운 지는 얼마나 됐어요?"

"얼마 안 됐지요."

"얼마 안 됐으니까 잘 못하는 거죠. 수십 년 전에 글을 배웠다면 지금 잘하고 있겠죠. 나이가 많아서도 아니고 머리가 나빠서도 아니죠? 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못 하는 겁니다. 정말 머리가 나쁘다면 말을 배우지 못했을 겁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글을 배울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좋습니다."


노인교육생들은 머리를 끄덕였지만, 이후에도 수시로 이 말들을 했다. 머리가 나빠서 혹은 나이가 많아서 뭘 못 한다고 생각해 반 포기한 상태로 살면서 행복할 수는 없다. 사유가 어떻든 반 포기 혹은 포기하고 살 때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하려는 즉 아레테를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 때가 더 자유롭고도 행복했다.


노인교육생들이 늙어서와 머리가 나빠서 란 말을 하지 않게 된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첫 번째 것은 간단한 체조다. 수업이 끝난 후 간단한 체조를 시작한 것은 것은 첫 수업 때부터다. 노인 교육생들은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어유, 시원하다!" 소리친다. 공부하느라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다가 뒤로 젖히니 시원할 수밖에. 머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ㅇㅇㅇ아 오늘 애썼어. 고마워."라고 하라고 하면, 노인 교육생들은 활짝 웃는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라 한다.


체조 중 한 동작은 팔을 옆으로 펼치고 한쪽 다리를 직각으로 들어 올리고 서 있는 것이다. 한 의사가 이 자세는 치매 검사에 포함된 것이라며 노인들에게 좋다고 하였다. 이 동작도 몇 달 동안 계속해왔다. 보통의 사람들에겐 매우 간단한 동작이다. 이분들이 발을 힘들게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면 연민이 마음속에 차오른다. 처음엔 책상을 짚고 겨우 발을 떼는 분도 있었다 아무도 직각으로 다리를 들어 올리지 못하지만 모두 처음보다 더 잘한다.


이것 말고도 좀 더 잘하게 된 것이 바로 책 읽기다. 수업 중에 내가 읽으면, 교육생들이 따라 읽을 때가 있다. 이분들은 모르는 글자가 있기도 하고 호흡이 짧다. 게다가 책에 나오는 문장 중에는 일상생활에 사용하지 않던 단어와 어구들이 있다. 이분들은 따라 읽기 좋게 짧게 짧게 끊어 읽어주길 바란다.


짧게 짧게 끊어 읽으면, 문맥을 이해하기 어렵다. 길게 읽어야 할 때는 길게 읽어야 한다. 내가 좀 길게 읽으면 교육생 중에 따라 읽기 힘들다고 불평하는 분들이 있었다. 속으로 불평하는 분도 있었을 것이다. 문장을 읽지 않고 글자 하나하나 혹은 단어 하나하나를 읽었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분들의 마음에 들게 수업을 할 수 없었다.


"문장을 짧게 끊어 읽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래서 내용에 따라 길게 읽기도 해야 합니다. 제가 읽을 테니 한 번 들어보세요."


문장이란 말을 처음 듣는 것은 아니지만, 뜻을 기억하는 분이 없다. 문장이 뭔지 먼저 설명해야 한다. 그것도 한분 한분에게 따로. 좀 긴 문장들을 선택해 짧게 짧게 끊어 읽고 다음엔 문맥에 따라 끊어 읽은 후 물었다.

"처음에 읽은 방법과 두 번째 읽은 방법 중 어느 것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요?"

"두 번째 거요."


이후 길게 읽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있었다. 그래도 이분들 마음에 들게 짧게 끊어 읽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내가 읽고 교육생들이 따라 읽을 때면 각각 속도가 달라 마지막 사람이 끝낼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때로는 같은 구절을 두세 번 반복해서 읽기도 한다. 몇 개월이 지난 지금은 따라 읽는 속도가 많이 빨라지고 매끄러워졌다.


"책 읽는 속도가 많이 빨라졌지요?"


어느 날 책을 읽다가 물어봤다. 모두들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한 분만 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분은 얼마 전 쓴 글의 '눈빛이 달라진 교육생'이다. 내가 '제 말 왜 그리 안 믿으세요?'라고 말한 바로 그분이다. 이 분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것이 내 눈에는 보였다. 본인은 인식하는지 모르겠지만.


동시를 읽을 때였다. 내가 먼저 읽고 교육생들이 따라 읽었다. 이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던 교육생이 말했다.


"처음 읽다 보니 발음이 제대로 안 되네."


라고. '늙어서' 머리가 나빠서'란 말을 입에 달고 있던 분인데. 얼마 전이었다면 불만과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늙어서 제대로 발음을 못하겠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분은 ‘책 한 권이면 돼지. 다른 게 뭐 필요하냐.’ 고 말했던 분이라 ‘ 말라고 이런 거 하노.’라는 말을 덧붙였을 수도 있다. ’ 읽다 보니' 란 말은 여러 번 하면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때 이분의 내면의 변화를 알아채고 기뻤다.


세 번 째는 동시 외우 기다. 보통 사람이면 다섯 번에서 열 번 연습하면 다 외울 수 있는 짧고도 간단한 동시를 외웠다. 이분들은 모두 '머리가 나빠서, '늙어서' 못한다며 외우기 싫다고 했다. 이분들의 동시 외우는 속도는 너무나 느렸다.


"이런 거 외운 적 있으세요?"

"없어요."

"거 봐요. 처음 해서 못하는 거예요. 나이가 많아서도 아니고 머리가 나빠서도 아니에요."


다 외우는 사람에게 상품을 걸기도 했다. 두 달 정도 걸렸을까. 마침내 몇 분이 첫 번째 동시를 외워 상품을 받아갔다. 이후 동시 두 개를 더 외웠다. 교육생 모두 두 번째 동시 외울 때는 첫 번 째보다 수월하게 외웠다. 세 번째 동시를 외울 때는 두 번째 동시 외울 때보다 더 수월하게 더 빨리 외웠다.


한 교육생의 '처음 읽다 보니 발음이 잘 안 되네.'란 말을 들은 후 노인교육생들이 하는 말을 유심히 들어보았다. 노인교육생들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나이가 많아서'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처음 해 봐서' '익숙하지 않아서'라는 류의 말이었다. 나는 놀랐다.


어떻게 해서 이분들이 이런 말하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이글에서 말한 세 가지 경험이 이분들의 내면에 변화를 일으켰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노인교육생들의 이런 내면의 변화는 지난해 한글 수업을 하면서 얻은 나의 성과이기도 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제 말 왜 그리 안 믿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