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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가 나와 무관하지 않다니!

미치게 친절한 철학책을 읽고

by 할수 최정희

철학사는 철학사이고 나와는 무관한 줄 알았다. 보통 사람들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깨닫고 한 말을 쫓아가며 사는 줄 알았다. 그래서 철학책을 읽어야 자신의 삶을 정의할 수도 있고 또 철학자의 말을 받아들여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념과 맥락으로 독파하는 철학이야기, 미치게 친절한 철학책 내용은 쉽게 읽힌다. 언젠가 읽어보았거나, 어떤 강의에서 들어보았던 내용인데 부제처럼 철학의 개념이 잡히고 내 삶의 맥락이 보인다. 그래서 인류의 거대한 철학사가 내 개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삶이 머릿속에서 두루마리처럼 펼쳐졌다. 이때 내 변천사가 한눈에 보였다. 내 싦의 변천이 철학사와 흐름과 비슷하였다. 철학사는 철학 이전의 시대, 신화의 시대에서 자연철학의 시대로 이행되었다. 다음엔 철학의 관심이 인간에게로 넘어갔다. 그다음엔 신 중심으로 넘어갔다가 인간중심으로 다시 넘어왔다.


보통사람인 내가 유아동기에서부터 노인이 되기까지 철학사와 비슷한 과정을 겪은 것이다. 유아동기를 거치는 동안 자연과 신화의 시대를 거쳤다. 청소년기엔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성인에 접어들면서 신 중심으로 넘어갔다가 노년기엔 다시 인간 중심, 내게로 돌아왔다. 말하자면 지금이 나의 르네상스인 셈이다.


유아동기엔 해와 달과 별들, 밤에 찾아오는 어둠과 비를 몰고 오는 구름과 바람들 이 모든 것이 신비로웠다, 때론 무섭고 두려웠다. 이때 모든 관심이 자연에 쏠려 있었다. 마당과 밭에 올라오는 풀과 꽃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식물의 생김새가 내 눈길을 끌었고 마음을 사로잡았다. 국화꽃, 작약꽃, 코스모스, 쇠비름들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는지 신기했다. 내 내면은 뭉게구름이 나타났다가 바람에 날려가기도 하고 다사 검은 구름이 모여들다가 햇살에 사라지는 하늘과 비슷했다. 내 마음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날아가기도 하도 다시 몰려드는 것들이 구름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감정들이었다.


자연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경탄하면서, 눈이 뚫어져라 꽃과 풀잎과 줄기와 뿌리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어느 날 하얀 뭉게구름이었다가 어느 날엔 양털구름으로 변하였다. 또 어떤 날엔 먹구름으로 변하면서 비를 뿌리기도 하였다. 밤이 찾아오기 전 으스름한 어둠과 그믐날 밤의 검댕이를 칠한 것 같은 어둠과 보름달이 떠있을 때 어둑어둑하면서 환한 그 빛들이 신비로웠다.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이 뛰쳐나올까 불안하기도 했다.


높은 하늘에는 은하수가 흐르고 별들이 무수히 반짝거렸다. 내 주변 공중엔 반딧불 수 천 마리가 날아다녔다. 신이 나서 와~ 소리 지르며, 반짝이는 반딧불 사이를 뛰어다녔다. 반딧불이 곤충인지 몰랐다. 내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나는 반딧불을 잡아볼 생각자체를 하지 못했다. 반딧불은 하늘에서 내려온 별이 날아다니는 줄 알았다.


국민학교에 다니면서 안데르센 동화책, 위인전, 세계문학과 전래동화 등을 읽었다. 이야기 속 세상이 상상의 나라가 아니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남극을 탐험한 아문센 이야기를 읽을 때도 이것이 상상의 나라인지 이 세상의 이야기인지 헷갈렸다. 아이들이 산타할아버지를 믿듯 나는 동화세계를 실제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는 자연과 신화의 시대를 거쳤다.


청소년기에 신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문학책과 철학책을 읽으면서 인간과 인간 삶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청년기엔 종교에서 그 답을 찾았다. 다시 말하면 청소년기엔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하다가 청년기에서 중년기까진 신 중심적인 사고를 한 것이다.


나는 종교에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을 만큼 열정을 쏟아부었다. 내가 열정을 쏟아부을수록 내가 소모가 되는 곳이었다. 이곳이 내 삶의 걸림돌이며 나를 억압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다른 누군가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노년에 다시 인간중심 즉 내게로 관심이 돌아왔다. 지금이 나의 르네상스 시대인 셈이다.


청소년기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왜 이곳에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지금도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역시 많다. 나 자신에 대한 관심도 많다. 하지만 질문이 바뀌었다. '왜'가 살고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로. 이 몸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기에 지금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르네상스 이후에도 철학사조가 계속 변해왔듯 내 생각도 앞으로 계속 바뀔 것이다. 세상이 변하고 나도 변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내가 이렇게 변했네'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변하고 있네'라고 변하는 순간과 과정을 알아채며 살고 싶다. 나의 르네상스를 제대로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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