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을 읽고 2
언젠가 딸과 이야기할 때였다. '나는 싱클레어과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내 말을 듣고 딸이 자신도 싱클레어과 사람 같다고 했다. 모전자전이다. 어쩌겠나! 생긴 대로 살 수밖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싱클레어과 사람에겐 필독서가 아니겠나. 싱클레어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내 속의 나를 바라보기로 한다.
데미안/2024년/믿음사
이번 이야기는 내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은 첫 칼자국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내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은 칼자국은 싱클레어의 것과는 조금 다르다. 싱클레어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은 칼자국은 아버지의 무지에 대한 것이고 , 내가 그은 칼자국은 아버지의 능력 없음이다.
싱클레어가 친구와 놀다가 프란츠 크로머와 어울리게 되었다. 아버지는 싱클레어의 젖은 구두를 보고 나무랐다. 가족이 모두 악명으로 이름이 높은 프란츠와 어울려 논 것만 해도 커다란 사건이다. 거짓말로 지어낸 이야기를 하느님 이름을 걸고 자신이 한 일이라고 맹세까지 했다. 그 결과 프란츠에게 협박까지 당했는데, 아버지는 소소한 일, 젖은 구두를 보고 나무랐다. 싱클레어가 프란츠와 한 일을 아버지가 모두 안다면 이 정도의 나무람만으로는 결코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싱클레어는 아버지의 무지에 대해 약간의 경멸을 느꼈고 자신이 아버지보다 우월하다고 느꼈다.
싱클레어는 이 일이 누구든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긋는 첫 칼자국이라고 한다. 이런 칼자국으로 생긴 균열은 갈수록 더 늘어난다고. 그것들은 치료되고 잊히지만 가장 비밀스러운 방 안에서 살아 있으며 계속 피를 흘린다라고 헸다. 내게 이 말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신성함에 능력 없음이란 첫 칼자국을 그었다. 아버지가 편찮으셨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지원해주지는 못하는 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할머니,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다섯 동생들에게 옭아매여 사는 것은 지옥이었다. 나는 내가 나를 위해 살 수 있도록 가족에게서 놓여 나길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나는 놓여날 수 없었다. 나로 살 수 없는 삶은 지옥이었다.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가족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 아니냐고?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삼수 사수 오수한 사람까지 다 부러웠으니까. 나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해보고 싶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칼자국을 그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하지만 한 번 마음속에 생겨난 균열은 균열에 균열이 더 일어나면서 계속 피를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나이가 든 지금은 안다.
나의 사춘기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시작되었다. 3월 말쯤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70명에 가까웠다. 담임 선생님이 이중에 딱 세 명의 아이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말했다. 그중 한 아이가 나다.
"A는 선생님에게 칭찬받지만,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B는 현모양처 감이다."
"정희는 냉정하다. 그런데 결혼하면 잘 살 것이다."
선생님 말대로 A는 선생님들에겐 칭찬받지만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B는 착실하고 품행이 반듯한 아이였으니, 선생님이 그렇게 볼만했다. 선생님이 나에 대해 한 말을 틀렸다. 선생님이 나를 잘못 본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다투지 않았다. 거칠게 혹은 쌀쌀맞게 굴지도 않았다. 정이 많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런 말을 들을 정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짝꿍과 앞뒤에, 다른 분단에 앉아있는 친구들에게까지 물어봤다.
"내가 냉정한 것 같아?"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에게 따지듯 물었다.
"선생님, 왜 제가 냉정하다고 생각하세요?"
"자신은 그렇게 안 생각해?"
선생님의 이 말이 나를 생각하는, 사춘기 속으로 떠밀어 넣었다.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바둑을 둔 후 바둑을 둔 순서대로 복기하며, 하나하나의 수를 왜 거기에 놓았는지, 어디에 놓았어야 이길 수 있었을지를 생각하듯이. 나 자신을 복기했다.
내가 한 행동을 떠올리며 그때 감정이 어땠는지를 그 행동을 하고 난 후 감정은 어떻게 변했는지를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상대방이 한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그때 그 사람의 감정이 어떠했었을지. 내가 어떻게 달리 말했으면 혹은 어떻게 달리 행동했으면 좋았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새로운 질문들이 생겨났다. 사람이 왜 여기 살고 있는지 왜 살아가야 하는지 왜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죽어야 하는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삶은 무엇이고 행복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문학책이나 철학책을 읽어도 알 수 없었다.
이때 내가 매료된 단어는 해탈, 달관, 관조 등이다. 해탈이나 달관을 하면 삶을 관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때는 절에 가서 중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깊이 생각해 보니 삶이 무엇인지 알려면 사람 속에서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유년시절, 이 집 저 집 마당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때 시집가서 친정에 온 이웃 여성들이 마루에서 하는 넋두리를 자주 들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나는 왜 저렇게 힘들게 살지? 그만 두면 될 텐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고등학교 때 문학책과 철학책들을 읽을 때, 친구네 집 마루에서 신세 한탄하던 이웃 여성들이 떠올랐다. 나는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이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때 페미니즘이란 걸 좀 접하게 되었다. 이 시절 내 마음속을 채운 사람들은 윤심덕, 나혜석과 버지니아 울프 같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들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윤심덕, 나혜석. 버지니아 울프처럼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더 배워야 했다.
근데 고삼 때 아버지의 병환으로 나의 이런 꿈은 태풍에 담벼락 무너지듯 무너졌다. 나날이 죽고만 싶었다. 한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식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해 줄 수도 없는데, 왜 낳았지?" 이것이 내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은 첫 칼자국이다.
정작 아버지들은 이 칼자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싱클레어와 내가 그은 이 칼자국들은 아버지에게 그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그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칼자국을 긋고 난 후 잘못을 한 것 같아 아버지를 전처럼 바라볼 수 없었다. 또 하나의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아버지의 권유로 공무원 시험을 쳤다. 이후 공무원으로 일하며 받은 월급을 꼬박꼬박 아버지께 드렸다. 내가 번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번 돈을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사람이 부러웠다. 내가 공부를 하는데 지원을 해주지는 못해도 좋았다. 다만 내가 번 돈으로 뭐든 배우고 싶었다.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죽고만 싶었다. 죽고 싶은 마음을 삭이면서 밤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 울었다.
내가 번 돈으로 나를 위해 산 것은 단 하나, 세계문학전집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이 책들을 펼쳐 읽었다. 이 전집을 읽고 또 읽으면서 차츰 울지 않게 되었다. 내가 아버지의 신성함에 칼자국을 냈다는 사실도 잊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볼 때, 심장이 요동치며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통곡하고 싶었고 사흘간 내리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영화를 본 후 또 시간이 지나갔다.
이젠 꿈을 포기하고 겪었던 아픔을 이야기를 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를 찾기 위해 나로 살기 위해 살아가는 중이라 내 생애 중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글을 쓰는데 또 눈물이 났다. 퇴고하려고 다시 읽는 중에 또 심장이 흔들리고 눈물이 났다. 내가 아버지의 신성함에 첫 칼자국을 내고 나서 곧바로 그 칼을 내 심장에 꽂아놓았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에도 심장이 흔들리고 그때 느끼던 아픔을 또 느끼는 것일 게다.
지금의 칼은 내가 아버지의 신성함에 첫 칼자국을 낼 때처럼 날카롭지도 차갑지도 않다. 세월과 함께 칼은 녹슬고 삭아내리면서 무뎌지면서 조금씩 온기를 더해 온 것이다. 차츰 심장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당장 뽑아낼 수는 없지만, 함께 살아도 괜찮겠다. 해탈, 달관, 관조라는 의미가 깊은 단어가 관심에서 사라졌으니까. 나는 기뻐하고 불안해하고 혹은 두려워하고, 화가 나고, 웃고, 울고, 짜증 나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자잘하게 살고 싶으니까.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에게 왜 내가 냉정하다고 생각하세요가 아니라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냉정하다고 생각했는지 물어봐야 했다. 선생님이 말한 냉정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봐야 했다. 선생님이 말한 냉정과 내가 생각하는 냉정의 의미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선생님의 그 말로 인해 내가 내 안의 데미안을 찾아 길 떠나게 되었다. 아직 데미안을 만나지 못했고, 언제쯤이면 만날 수 있으리라는 예상도 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계속 길을 갈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그은 첫 칼자국에서 계속 피가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칼이 흔들려면 눈물이 난다. 하지만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눈물이 흐르고 심장이 흔들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 때론 심장이 흔들려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이는 내가 가야 할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이고 내가 걷는 길을 밝혀 주는 조명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