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교실에서
한글교실에서 일기를 써 오는 교육생이 한 분 있다. 친구랑 갓바위 갔다 온 이야기, 아파트에서 이웃 주민과 만나 나눈 이야기 등 일상적인 이야기다. 호박을 산 날은 둥글둥글한 세상 둥글둥글 웃으며 살아야지 같은 시적인 일기를 써 오기도 한다. 때론 살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와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한 글을 써오기도 한다. 이 교육생과 같이 읽으며 잘못 쓴 글자를 바로잡아 준다.
내가 이곳 한글반 수업을 맡은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수업을 끝내고 복지관 가까이 있는 큰 마트에 갔다. 나또 한 봉지를 집어 들고 과일 코너로 가는 중이었다. “선생님” 하는 낯익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 교육생이었다. 카트에는 과일과 채소, 고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물건이 가득 실린 카트를 잡고 선 상태로 이 교육생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고. 자신이 낳은 자식은 없고 남편은 재혼이고 아들과 딸이 있다고 했다. 며느리가 고등학교 교사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서 아침저녁으로 손자녀를 돌봐 준다고 했다. 아침에 남편 식사 준비를 해주고 아들집으로 가서 아이들을 깨워 아침을 먹여 학교에 보낸다고. 오후엔 또 아들집에 가서 학원에도 보내고 저녁밥을 지어먹어야 한다고. 글공부 많이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고.
작년에 남편이 갑자기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몇 달을 결석하고 올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늘 고맙다며 식사 대접하고 싶다고 한다. 얼마 전엔 탈모 방지 샴푸를 선물로 주었고 그전엔 핸드크림을 한 개 주었다. 동화책 읽는 때 한 사람 한 사람씩 어떻게 읽는지 들어보고 내용은 이해했는지 알아보고 잘못 읽는 글자는 읽은 법을 가르쳐주고 이해를 못 하는 부분을 설명해 준다.
이때 한 사람에게 좀 시간이 걸리면 교육생들이 싫어한다. 각각의 교육생들에게 비슷한 시간을 사용하려고 하지만 때론 그렇게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각자 자신의 수준에 맞는 동화책을 읽는 시간에 이 교육생이 써온 글을 보고 고쳐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좀 길어진다 싶으면 다른 교육생들이 불평할까 이분은 부담을 느끼고 내게 그만하라고 한다. 다른 교육생들은 일기를 안 써와서 못 봐주는 건데도.
이 교육생은 일기를 써와서 시간을 더 들여야 하고 능력이 좀 모자라는 교육생은 시간을 더 들여야 이해하기 때문에 시간을 더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교육생 중에는 이런 걸 못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어서 신경이 쓰인다. 나는 이 교육생에게 시간을 더 들여 봐 주는 것은 이 교육생이 일기를 써온 까닭이고 다른 교육생들은 일기를 안 써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완곡하게 알려주기로 했다.
"일기나 지나간 일들 무엇이라도 써오면 잘못 쓴 것을 고쳐주겠다고 여러 번 말했지요? 요즘 일기를 써오는 사람이 한 사람이 있어요. 우리 박수로 칭찬을 해줍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교육생을 향해 함께 박수를 쳤다. "일기나 기뻤던 일 슬펐던 일 속상했던 일 무엇이라도 써오세요. 고쳐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