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교실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영종하늘도서관에서 나의 중년은 청춘보다 아름답다 북토크를 한 날이었다. 멀리 온 김에 작가님들과 유람선을 타고 월미도 구경하러 갔다. 짜장박물관 입구에서 경로 할인을 받으려고 신분증을 꺼낼 때였다. 병원에 입원 중인 한글반의 91세 노인교육생 이름이 휴대폰 화면에 떴다. "선생님, 이젠 못 나갈 것 같아요. 결석 수술을 했어요. 미안합니다." 교육생이 떨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2 주전 항상 나오시던 이 교육생이 결석을 했다. 모두 걱정을 했다. 전화를 했더니 몸살이 났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교육생들을 향해 말했다. "몸살이 나서 결석을 하셨대요." 모두 걱정스러운 말을 하는데, 한 교육생이 "이젠 못 나올끼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이때는 금요일이었다.
월요일에 91세의 교육생이 핼쑥한 얼굴로 나왔다. 몹시 피곤해 보였다. '좀 더 쉬다 나오시지. 더 아프면 어쩌시려고.'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한자라도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후 연달아 며칠을, 결석을 했다. 결석이 이어지자 교육생들이 걱정을 했다. 강의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나는 전화를 했다. "선생님, 아직 안 나았어요. 죄송해요. 나으면 나갈게요." 죽을 사서 가봐야겠다는 교육생이 있었다. 반면 "이젠 못 나올끼다.'라고 하던 그 교육생이 또 단정적으로 말을 했다. '나이가 있는데 우째 낫겠노. 이제 못 나올끼다.' 마치 그러기라도 바라는 듯.
그리고 며칠 후 91세의 교육생은 입원했다. 이 소식을 교육생들에게 전하자 또 부정적인 말을 하던 교육생이 "곧 죽겠다. 이젠 여기 못 나온다."라고 했다. 91세의 교육생이 이 말들을 들었다면 얼마나 서운할까?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같이 공부하는 교육생들도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모두 나이가 적지 않은, 같은 처지인데.
짜장박물관에서 91세 교육생의 전화받은 다음 날 한글반 수업에서였다. "이제 퇴원하셨다고 해요. 이제 못 나올 것 같다 하셨어요. 그래도 괜찮아지면 나오시라고 말씀드렸어요." 안 하면 좋을 말을 하던 그 교육생은 또 "내 못 나올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
내가 이 반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교육생들의 성향을 모를 때였다. 이 교육생이 부적절한 말을 했다. 그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내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 교육생이 내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선생님, 저 사람 원래 저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처음엔 이 교육생이 왜 저럴까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의 지금 모습은 지난날 어떻게 살아왔는지와 현재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91세 교육생은 숙제를 꼬박꼬박 해온다. 쉬는 시간에도 대입 수험생처럼 공부를 한다. 어릴 때 못 배운 글,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싶다고 한다. 키는 150cm 정도로 아담하다. 둥근 얼굴에 늘 두건을 쓰고 온다. 다리를 약간 벌리고 어기적 걷는다. 다행히 집이 복지관 바로 부근이라 잠시 걷기만 하면 복지관에 올 수 있다. 늘 활짝 웃으며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반면 "못 나올 끼다."라는 말을 하는 교육생의 얼굴을 보면, 기도가 막힌 듯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지난날 하고 싶은 일을 하자 못해, 억울한 일을 당해서, 이해받지 못해서, 인정받지 못해서 생겼을, 부정의 감정이 옷감에 염료가 베어 들듯 얼굴에 베여있다.
91세 교육생은 생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을 찾은 것 같다. 내가 보기엔 해탈한 노승처럼 내면이 고요하여, 지금 살아 숨을 쉬고 한글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반면 부정적인 교육생은 예전에 못 배운 글공부를 하러 왔지만, 이 글공부에 임하는 자세도 부정적이다. 나는 머리가 나빠 못한다. 나이가 많아서 못한다는 말을 자주 하며 수업에 적극적으로 첨여하지 않는다. 작년 1년 동안 숙제를 해 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글이 늘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이젠 꼬박꼬박 숙제를 해온다.)
이렇게 매사에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투덜거리는 사람과 함께 활동하는 일은 불편하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자신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지 모른다. 자신은 정당하고 옳고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날 자신을 휘몰아쳤던 좋지 않은 일에서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그 상처가 깊어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혹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자주 부정적인 행동이나 말을 하는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과는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환경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누구라도 91세의 교육생처럼 지난날 겪었던 고통과 슬픔을 극복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이 교육생이 왜 자꾸 이런 말을 하느냐고 하기보다. 지난날의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겠다.
나는 자주 이런 류의 말을 한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라 좀 불편하지만 그래도 한다. 이분들은 글자만 알려고 하고 글자를 읽고 그 내용을 알려고 하지 않아서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을 때 그 뜻을 알면 재미도 있고 그 이야기에서 삶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요즘엔 교육생들이 내가 하는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