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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가보고 싶었다

by 문 내열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다는 스포츠경기가 있을 때면 대한민국 팀은 일본을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이는 대회우승 못지않게 중요하고 절체절명이다. 누가 시키거나 선동해서도 아니다. 언제부터 인지는 몰라도 이게 국민정서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런 일본을 찾아가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전해 듣기로는 깨끗하고 질서 정연하고 사람들은 예의가 바르다고 들었다.


국력과 국운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상하여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중국과 아세아권 전체를 침탈했다. 더 나아가 미국까지 넘보고 대들다가 (원자) 폭탄 한 방에 손들고 항복했다. 그러나 패망하고도 선진 7개국 반열에 올라있는 아세안 유일 국가다.


그뿐인가 미국 서부에서 프리웨이를 달리면 차량의 절반 이상이 일제차다. 우리의 눈을 의심케 한다. 양적으로 압도적일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도요다 회사에서 생산된 렉서스 차량이 미국시장에 처음 소개됐을 때 우리는 이를 드림카(dream car)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차 시동을 켜놓고 안에 앉아 있으면 엔진소리가 전혀 들리지 앉는다고 하여 차밖에 서있다가 순차적으로 차 안으로 들어가 정말인지 확인했던 그날이 너무도 생생하다.


윈실드 와이퍼(windshield wiper)가 물기를 완벽하게 제거하지 못해 서비스를 해달라고 딜러에게 전화했더니 직원이 집에까지 직접 찾아와서 차를 픽업해다가 수리하여 갖다 주었다. 그뿐인가 수리기간 동안 임시로 타고 다닐 차량은 손님이 원하는 것을 고르면 그 차를 집으로 가져다주었다. 그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차별화된 고객 서비스였기에 우리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비행거리로 2시간 이내에 인접해 있는 일본이 이토록 대국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은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았겠는가 싶었다.


나는 님도 보고 뽕도 딸 겸 벚꽃 개화기에 맞춰 이 주간의 일정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으려나 해서 Airbnb를 이용하여 시내 호텔이 아닌 주택가 깊숙한 곳에 숙소를 잡았다. 아침에 일어나 조깅하면서 동네 골목길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기도 했다. 항공기 대신 신간센 고속열차를 탔다. 지하철, 버스, 택시, 완행열차, 선박까지 이용하며 그들의 대중교통도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가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아날로그식 시스템 운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면 시스템이 자동화돼 있고 안내판은 한글, 영어, 일어, 중국어로 표기되어 있다. 시스템과 안내판이 잘 되어있다. 그 어디에서도 역무원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 승객들을 돕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마치 제국주의 시대를 연상케 하는 딱딱한 분위기의 엉성한 제복을 입은 역무원들이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승객들을 돕고 있었다. 그만큼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게다. 인건비가 한두 푼이 아닐진대 이리도 많은 역무원들이 근무하고 있다니 마치 우리나라 20년 전을 보고 있는 듯했다.


지하철 승객들 중에는 지금도 종이 신문이나 종이책을 읽고 있어 신기하가까지 했다. 식당이나 커피숍도 키오스키 대신 종이 메뉴판을 들이 내밀고 있다.


맛집으로 소문난 덧밥집과 가락국수집을 찾았다.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종업원이 나와서 종이 메뉴판을 나누어 주면서 메뉴를 미리 선택해 달라고 부탁한다. 문 앞에는 현금만 받는다고 써 붙어있다. 우리나라는 골목길에서 군밤을 파는 리어카상이나 밭에서 손수 수확해 온 포도 몇 송이를 팔고 있는 행상도 계좌이체로 장사를 하고 있는데 현금만 받는다는 게 웃프기만 했다.


히로시마역과 버스터미널 근처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영업용 택시들은 우리나라 80년대 현대 포니라는 차량을 연상케 한다. 차 모양도 매우 흡사하고 사이드미러(백미러)가 보넷 앞 끝자락에 붙어있다. 한두 대가 아니고 역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영업용 차량의 20여 대가 모두 같은 모양이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것을 거역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영어를 거부하는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하네다공항에 도착하니 이민수속을 밟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 이리도 많은 관광객들이 일본을 찾는 걸 보니 내가 잘 찾아왔구나 싶었다. 지금껏 여행 중에 가장 길게 줄을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던 것 같다. 내 기대는 딱 여기까지였다.


화장실, 도로 표지판, 식당, 관광명소에 영어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옛적에 배웠던 한자어 실력으로 가늠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일왕이 머무르고 있는 imperial palace 정문 앞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숍을 들렀다. 손님이 줄잡아 50명 정도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주문은 영어로 가능했지만 픽업카운터로 가서 줄을 서있는데 호출번호를 알려주는 스크린도 없었고 종업원은 일본어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내가 주문한 커피는 언제쯤 인지 도무지 상항판단이 안 됐다. 내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지금 뭐라고 하는지 알아먹겠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젓는다. 둘이서는 서로 마주 쳐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던 적이 있었다.


영어가 가능한 대중식당을 찾지 못했다. 명동거리를 방불케 하는 도쿄 가부기 거리에 있는 어느 초밥식당을 찾았다. 나는 영어로 묻고 종업원은 일본어로 설명을 하고 있다.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으니 누가 누구를 모시는지 모르겠다. 다른 여행지 같으면 영어가 가능한 종업원을 불러 주거나 아니면 전화기 번역기로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려고 나름 애를 쓰련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일본어로 읊어대고만 있다. 짜증 나고 실망스러웠다. 아니 콧대 높은 자존심 때문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방에게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고들 하는 일본 에서의 경험은 사뭇 달랐다.



그들은(일본인) 너무 진지하고, 결연하고, 심각해 보였다. 낭만과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속을 헤집어 볼 수는 없지만 지하철에서 마주친 직장인들의 표정은 활력이 없어 보이고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였다. 정장으로 차려입고 있어 그렇게 느꼈을 련지도 모른다. 아니 비쩍 마른 얼굴이 내게 그런 이미지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다. 살아온 삶과 순간의 감정을 함께 담아내는 게 인상이고 풍김이다. 지하철뿐만이 아니다. 아파트 주변을 청소하는 아저씨, 동네 골목길을 쓸고 있는 아주머니로부터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내 느낌이 편견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국여행에서 느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낭만적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들은 여유가 있고 편안해 보였다.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흥얼거리며 즐겁게들 일을 한다고 한다. 능력과 실력으로 자신을 차별화시킬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면 차라리 현실을 부정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순응하며 즐기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나는 중국 여행 중에 사람들에게 "현재 당신의 삶은 행복합니까?"하고 물었다. 대답은 “예”였다. 긍정과 부정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고 나서 한 문제 못 맞혀 만점을 못 받은 학생이 안타깝다며 책상에다 머리를 쥐어박았다고 한다. 한 문제 틀리고 다 맞혔으니 대단한 게 아닌가? 덩실덩실 춤을 춰야 하는 게 아닌가? 다음에는 기필코 다 맞혀야겠다는 도전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못 맞힌 한 문제 때문에 멋진 시헝결과가 저 평가받았다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밝은면 보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더 커 보일 게다. 나는 일본을 여행하면서 왠지 여유가 없어 보이고 밝아 보이지 않는 그들이 안타까웠다.



푸집하지 못한 그들의 밥상이었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여행을 즐긴다.

첫째는 눈을 호강시켜 주기 위해서다. 대자연의 웅장함과 신비함에 가슴은 늘 설렌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위대한 건축물 앞에서는 옛 선조들의 지혜에 숙연해지곤 한다.

둘째는 입을 호강시켜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일본여행에서 내 입은 내내 못마땅했다. 스시초밥을 빼놓고는 이렇다 할 메뉴를 찾지 못했다. 스시초밥도 배불리 한 끼니 먹기에는 너무 비싸다. 우동, 덧밥, 라면? 글쎄다. 이들은 점심으로 한 끼니 때우는 식사라고 해야겠지? 푸짐한 한상을 받아 들고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나누는 식탁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달랑 우동 한 그릇, 라면 한 그릇, 덧밥 한 그릇이 전부인 일본의 밥상이 내게는 너무 초라하게 다가왔다. 삼겹살 한판을 구워 먹더라도 푸짐한 야채와 밑반찬이 먹음직스럽게 깔려 있는 게 우리네 식탁이다. 음식문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인들의 체구는 왜소하고 빈약했다. 요즘 한국이나 중국을 둘러보면 젊은이들의 훤칠한 키가 예전 같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비만한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장을 멈춘 듯 한결같이 키가 작고 마른 체구였다.



꾸밈을 모르는 일본 여성들. 젊음을 뽐내고,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며 명동거리를 활보하는 많은 한국 여성들은 K뷰티의 자랑거리다. 모두들 세련되고, 화려하고 활기찬 모습이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한국여성들을 보면 나이에 관계없이 얼굴은 뾰얏코 짓게 바른 립스틱은 아름답기만 하다. 비록 청바지 차림이지만 나름 때깔이 나고 제법 세련돼 보인다. 그러나 일본 여성들은 꾸밈이 없어서인지 검소해 보이고 수수해 보인 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활기가 넘쳐 보이지 않았다. 젊은 여성들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나이 든 여성들이 예쁘게 꾸미고 나오면 세월을 거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데 일본 여성들은 그렇지 않으니 매가리가 없어 보였다.


일본 여행 중 보름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 내가 느낀 것들은 실망 그 자체였다. 질서 정연하고 깔끔하긴 하지만 활력을 잃어 보이고 성장을 멈춘 듯 그 어디에서도 공사 중인 기계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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