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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빈자리

by 문 내열

아버지께서 칠 년 전에 돌아가셨다. 우리 아버지는 경찰로 40년간 공직생활을 하셨다. 그것도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한 형사 이셨다. 사고현장에 출동하여 매의 눈으로, 마이크로와 매크로 줌을 동시에 가동하면서 법인의 단서를 찾아내는 게 아버지의 임무였다. 때로는 사람이 죽어간 현장을, 동네에서 칼부림이 일어난 곳을, 간밤에 금품이 털린 회사 사장님 집에는 여지없이 우리 아버지가 다녀간 발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라고는 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다 보니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사람들의 유혹이 늘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교통위반으로 경찰에 걸리면 운전 면허증 제시를 요구했다. 그러면 면허증 뒤에다 현금 만원, 이만 원을 숨겨 함께 건네주면 현금만 잽싸게 챙기고 운전 면허증을 돌려주면서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하고 경고만 받았던 시절도 있었다. 경찰서장이 자리를 옮겨가면 이취임 인사차 격려금이 집 한 채씩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뇌물이 들어온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데도 우리 집에는 명절이 돼도 사과 한 박스도 찾아오지 않았다. 앞 집에는 경찰국 고위 간부가 살고 있었는데 명절만 되면 선물을 든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세상물정을 몰랐던 나는


"엄마, 우리 집에는 왜 선물이 안 들어와? 아버지는 직장에서 계급이 높지 않은 신가 봐?

끌쌔다, 잘못 먹어 탈이 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니? 나는 너네 아빠가 오래오래 근무하실 거라고 생각해"


고등학교 다닐 무렵 우리 앞집에 살던 그분은 뇌물을 잘못 먹다 걸려 그만 쫓겨나고 말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 아버지는 앞뒤가 꽉 막힐 만큼 융통성도, 세상과 야합할 줄도 모르는 충직한 형사 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칠 남매는 홀로 계신 어머니를 각별한 정성으로 모셨다. 주말이면 칠 남매가 돌아가며 어머니를 모시고 나가 식사도 같이하고 콧바람도 쏘여 드리곤 했다. 당신이 행복해하실 땐 “너의 아버지도 함께 계셨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혼잣말을 내뱉곤 하셨다.


두 분이 살아 계실 때 지금처럼 잘했더라면 얼마니 좋았을까 하고 후회를 하기도 해 본다. 그러나 그때는 믿었던 구석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우리 칠 남매도 이렇게 훌륭하게 키우셨는데 하물며 어머니 하나쯤 돌보지 못하시겠나 하고 아버지를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던가 싶다.


참으로 어리석은 게 우리 인간이다. 남들에게 없는 것을 내 손에 쥐고 있을 때는 귀한 줄 모른다. 잃어봐야 알게 된다. 남들이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두 분이 살아 계실 때 지금의 반만 해 드렸어도 후회를 하지는 않을 터인데


노인들이 쓰시던 소파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도

“이제 사시면 얼마나 사신다고 웬만하면 대충 쓰시지” 했다.

그러다 아버지께서 우리 곁을 떠나자마자 우리 칠 남매는 돈을 모아서 소파를 새것으로 바꿔 드렸다. 새로 들여온 소파에 어머니 혼자 앉아 계신 모습이 왠지 외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두 분이 함께 앉아서 흐뭇해하신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다려도 후회해도 이제는 곁에 계시지 않는다.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날 어머니는 그리도 슬퍼하셨고 크게 우셨다. 나는 조금은 의아했다.

@ 소문난 잉꼬부부도 아니었는데

@ 칠 남매 중 어느 놈 하나 못 미더운 놈도 없는데

@ 가난에 쪼들려 살다가 이제 살만하니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 결혼한 지 몇 년도 아니고 육십 년을 함께 살다 헤어지셨는데

뭐가 그녀를 저리도 슬프게 했는가를 헤아려본다.

우리가 헤아리지 못했던 사연이 있지는 않았는지? 어머니의 깊은 속을 어찌 들여다볼 수 있기나 하겠는가.


어느 날 나는 어머니와 단 둘이서 우리 칠 남매가 사준 소파에 앉아서 어머니의 마음을 살짝 건들어봤다.


"어머니, 지금도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시는가 요?

너도 나만큼 살아봐라.

심장의 절반이 없어졌으니 숨 쉬는 것마저도 불편 하 단다

돌아가시기 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꼭 껴안으시기에 영감이 왜 이러시나 하고 뿌리쳤단다. 이제 돌이켜보니 그게 내 심장의 절반을 빼앗아 가느라 그랬었나 보다."


자식들이 결혼하여 둥지를 박차고 나가기 전에는 늘 내 곁에 있었고 내 통제 하에 있었다. 그들이 내 곁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을 붙들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었고 그들은 내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도 먹고 살만큼 돈도 잘 번다면서 자식 걱정은 하지 말란다. 지척에 살고들 있지만 바쁘다며 얼굴을 내민 지도 오래다. 고사리 같이 부드러운 손으로 엄마를 안아줬던 그 품이 그립기도 하다. 이제는 제 처자식들이 먼저다


늙어지면 곁에 누군가가 더더욱 필요할 것이다. 젊었을 때에야 홀로 되면 재혼도 가능했겠지만 힘 빠지고 돈 떨어진 이 늙은 몸을 그 누가 쳐다보기라도 하겠는가? 갈 곳도 의지할 것도 없는 어머니에게는 아버지가 그 어느 때 보다도 필요로 했을지도 모른다. 혹여 몸이라도 불편해지면 의지할 곳이라곤 영감뿐이다. 아파도 자식들이 걱정할까 봐 이제는 아프다는 소리도 대놓고 못하고 있다. 어머니에게는 아버지의 빈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어럼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날 그리도 슬프고 애처로이 우셨던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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