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들이 대학을 마치고 취업을 했다. 미국에서 자식들 대학 뒷바라지 한다는게 정말이지 등골을 빼는 고통이다. 부모가 능력이 없으면 당사자들이 학자금 융자를 받아서 다닐수도 있지만 우리 부모가 나를 위해 희생했던 만큼 나도 그들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돼있는 새대의 부모다. 대학을 마치고 취업이 안돼 비실 거리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을 했는데 취업이 됐다니 홀가분한 기분이다.
취업도 했겠다, 학자금 융자도 없겠다 이제부터는 내 세상이다. 첫 일 년을 지켜보니 신이 났다.. 포드 머스탱 스포츠형 새 차를 뽑아 여자 친구를 태우고 사방팔방으로 으시대고 다닌데 마치 지 세상인 양 천방지축이다. 속으로만 참 좋을 때다. 잘 노는 줄만 알았는데 직장에서도 잘하고 있다고 자랑이다. 그래 네가 누구인데 내 아들이잖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이제부터는 아내와 나 우리 두 사람만의 시간이 필요하여 오랜만에 장거리 여행을 떠났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서로를 위로하고 등을 토닥거려주는 행복한 여행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아들에게 공항 픽업을 부탁했다.
아들이 엄마차를 끌고 공항에 마중 나왔다. 왜 엄마차를 운전하느냐고 물으니 "그냥" 이란다. 뭐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여 차고문을 열고 들어가도 아들차가 보이질 않는다. 아들차는 음주운전에 걸려 압류당했다고 실토한다. 직장도 음주운전으로 해고되기 전에 사표를 먼저 쓰는 게 좋겠다는 상사의 권유로 퇴사했다고 한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살면서 얼마 만에 느껴본 행복이었는데 그것도 순간이었다.
음주운전으로 모든 것을 잃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 영락없는 패잔병이다. 그동안에 흥청망청 긁었던 카드청구서, 음주운전으로 인한 범칙금, 전화요금등이 목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압류당한 차를 되찾기는 했지만 보험회사로부터 퇴출당해 운전이 불가능하다. 거기에다 운전교육을 받아야 하고 사회봉사도 해야 하는데 운전을 못하게 됐으니 죽을 맛이다. 사면초가는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식사시간마다 나와 마주친 아들은 죄인 아닌 죄인의 모습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측은해 보인 모습이 연기생활을 몇십 년 했던 탈랜트들보다 더 가관이다. 인생이 한순간에 망가지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사고와 판단력이 떨어진다. 방구석에 처박혀 음주운전을 자책할 뿐 난국을 어떻게 헤처 나가야 할지 묘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게 역력해 보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으니 막노동이라도 해보라고 했다. 일용직 직업소개소에 등록을 해놓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여기저기에 팔려 다니면서 몇 푼씩 돈을 벌어오기 시작한다. 영락없는 인생 막장이다. 아들은 일 년 동안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가까스로 카드 거래정지를 면하고, 전화기도 압수당하지 않고 어찌어찌 살아간다.
일 년여 동안 노동 치며 살더니만 정신이 드는지 직장을 다시 찾아보겠다고 나선다. 나는 속으로 “글쎄 그게 가능할까”했다. 음주운전으로 행동반경이 집과 직장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채용해 줄 회사가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 보인다. 은행에 취업코져 지원했는데 합격했고 마지막으로 신원조회만 통과하면 새 출발을 할 수 있다고 기대에 차있다.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다시 풀이 죽는다. 그놈의 음주운전이 내 앞길을 이토록 처절하게 가로막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포기하지 않고 이 회사 저 회사에 문을 두드려 보지만 면접까지는 거침없이 합격되는데 신원조회에서 번번이 막힌다. 나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들아, 음주운전 문제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그렇게 허술하지 않단다. 이미 네 신상기록에는 음주운전이라는 주홍글씨가 쓰여 있단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법. 음주운전이 떳떳하지는 않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충분히 반성했으니 지금부터는 뒤로 숨지 말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거라. 면접을 할 때 네가 먼저 음주운전 숙려기간이라고 알려주고 이게 문제가 된다면 면접을 멈추고 저를 이곳에서 내 보내세요 해봐라.
다음날 면접에서 돌아온 아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두 손을 불끈 쥐며 "드디어 합격했습니다. 고마워요 아빠의 솔로몬의 한 수가 통했어요. “
솔로몬의 지혜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법. 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았으면 움츠리지 말고 당당하게 나서는 용기가 아닌가 싶다.
대학졸업을 앞둔 조카와 몇 차례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니 신난해 보인다. 같은 과 학생 중에서 취업을 한 학생이 한 명도 없다 한다. 요즘은 토익 점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학원도 다니고 있다. 대기업들의 신입사원 모집인원이 현격하게 줄어 그 어느 때 보다도 취업문이 좁아졌다고 푸념이다.
힘내라고 고기를 사줬다. 그리고 커피샵으로 옮겨 커피를 마시면서 한 마디 툭 던졌다.
면접 볼 때 "당신들 나 같은 인재를 놓치면 후회할 겁니다"라고 해봐
조카는 피식 웃어 버린다.
다시 만날 때는 "어찌 잘 돼가냐?"라고 묻기도 부담스러웠다. 당사자만큼이나 절실한 사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싶어서다. 고기나 많이 먹고 힘내라고 응원했다.
조카가 모처럼 말을 건넨다.
"이모부 졸업 시에는 취업이 잘 됐어요?
글쎄다. 나는 당시에 세 군데서 오라고 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일자리를 찾느라 애를 먹더군"
조카가 한숨을 쉰다. 답답하다는 의미로 들렸다.
나의 솔로몬의 지혜를 꺼내야 하나 망설이다. 말문을 열었다
네가 경쟁자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 봐. 토익점수? 만점 못 받았지? 너와 같이 지원한 사람들 가운데는 만점자도 많을 것이다. 여타 다른 스펙? 어학연수, 봉사활동, 인턴싶? 이는 기본인데 이를 안 갖춘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내가 심사위원이라면 토익을 포함한 기본스펙에 대해서는 들여다보지 않겠어. 토익 900점과 950점은 내게 별 의미가 없거든. 내 앞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이 사람이 우리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들여다 보고 있는거야. 면접을 위해 용모를 다듬고, 학원에 가서 인터뷰 훈련을 받고, 예상 질문을 공부하지만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를 찾는다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게다. 내가 본 너의 차별화는 multi language 가 아닌가 싶다.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은 한국어, 영어, 중국어. 중국에서 15년간 학교를 다녀 중국어에 능통하고 중국 현지인과 다름이 없을 만큼 중국문화에 익숙해 있다는 게 대단한 장점이란다. 이를 필요로 하는 회사를 찾아가 "여기에 숨겨진 보물이 있습니다"라고 알려 주게나.
조카로부터 전화가 왔다. 며칠 전에 모 회사에 지원했는데 이모부의 솔로몬의 지혜가 적중했단다. 면접 마지막에 3분만 시간을 주신다면 제가 남들에 비해 뭐가 다른가를, 제가 이 회사를 위해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지 설명해 보겠다고 했더니 기회를 주더란다.
저는 15년간 부모님과 함께 중국에서 살면서 성장했고 중국인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제 ChineseKorean 입니다. 저의 출중한 중국어 실력으로 이 회사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아 지원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중국어로 자기소개를 해보란다. 고기가 물 만난 듯이 읊어댔더니 면접관이 빙그레 웃으면서 대단하다고 칭찬을 했답니다.
솔로몬의 지혜란 귀신을 잡는 기이한 것이 아닙니다. 남들에게는 없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아내는 것이다. 면접관 앞에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저는 열정과 노력하는 인간형입니다. 이런 진부한 것들은 기본이지 어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신을 차별화시킬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