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혹한을 견뎌내고 땅 속에서 솟아 올라오는 새싹을 보고서 생명의 신비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봄을 맞이하는 우리 마음도 긴 기다림 끝에 새싹처럼 희망이 고개를 들고 설렘이 가슴속을 파고든다. 4월 어느 날 봄처녀가 봄바람에 실려 우리 집을 찾아왔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금발의 봄처녀는 피부가 하얗고, 키가 훤칠한 서양 아가씨였다. 미국에 와서 살면서 서양 년이 우리 집 문지방을 들락거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시카고에서 근무하고 있는 둘째 아들 녀석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다. 얼굴값을 하느라 벌써 세 번째 바뀐 여자친구다. 첫 번째는 한국계, 두 번째는 히스패닉계, 이번에는 백인계 여자친구다. 맨 처음에 한국계 여자친구를 소개받았을 때만 해도 이분이 어쩌면 우리 집 새 식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와이프와 나는 설레였다. 여자친구가 마치 우리 집 며느리라도 될 것처럼 김칫국부터 마시며 그녀를 놓고 총평을 했었다.
얼굴을 봐서는 착한 사람일 것 같아
말하는 매너가 집에서 교육을 잘 받은 것 같아
벌써 우리를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우리 아들을 많이 사랑하나 봐
아들은 우리 집에서 새 여자친구와 이틀간 머물렀다. 뭐가 그리도 바쁜지 엄마 아빠는 안중에도 없다. 마음속으로
“참 좋을 때다. 저들이 우리와 함께 앉아 있는들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저때는 세상이 자기들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기에 딱 좋을 때인데. 나도 부모님이 우리 사이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해본 적이라도 있었던가 싶다. “
시카고로 돌아가는 날 아침 그들이 앉았다 일어난 빈자리를 쳐다보며 어엿한 직장도 있겠다, 나이도 30대 중반이면 어린애들 풋내기 사랑도 아닐진대 “결혼할 생각들은 있는지?” 묻고 싶었다. 금방이라도 혀끝에 맴돌았지만 "오죽이나 잘 알아서 결정들을 할까" 생각하고 다시 집어삼켜버렸다. 그래도 행여 그들의 장래에 대한 무슨 언질(약혼)이라도 주려나 하고 귀를 곤두 세우고 기다려보았지만 “잘 쉬었다 갑니다” 가 전부였다.
파란 눈의 여자친구가 다녀간 지 한참 지났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에 전화가 왔다. 하와이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 얼굴이라도 보고 가겠단다. 딸이 없어 집안이 삭막 하기만 했는데 젊은 여자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사뿐사뿐 걸어 다닌다고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레었다. 공항에 마중이라도 가고 싶다고 했지만 집에서 기다리란다.
집 앞에 나타난 그들을 보고 놀랬다. 아들은 구렛나루와 턱수염을 길러 중후한 중년남자가 됐고 여자 친구는 임신 팔 개월짜리 배불떼기가 되어 돌아왔다. 그녀의 배를 보는 순간 내 머릿속이 하해지고 말았다. "어서들 오너라"는 인사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으니 아들 여자친구가 풍선만 한 배를 내밀고 내 앞으로 다가와 허그를 하잖다. 우리 앞에서 아들도 여자친구도 당당하고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아들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엄마, 아빠 손주를 만들어 데리고 왔습니다"
되려 와이프와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맞이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고, 여기가 한국이 아닌 미국이라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자식 기르면서 큰소리치지 말라고 하던데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군. 나야 어찌어찌 감내할 수 있다지만 내 주위에 친지들과 한국에 계신 부모님에게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와이프와 나는 집을 나와 인근 커피샵을 찾았다. 대화도 없이 우리는 그저 커피잔만 쳐다보고 있었다. 커피잔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세상 별것 있나요? 너무 심각하지도, 실망하지도 마세요. 비록 일의 순서가 바뀌었지만 그들은 잘 살 거예요. 수억씩을 들여 호화롭게, 호들갑을 떨며 결혼해 놓고 몇 년 못 가서 사니 못 사니 야단들인 사람들이 어디 한두 명 이나요? 그냥 지켜보세요. “
그녀의의 풍성한 배를 보면 눈 둘 곳이 없어 집으로 돌아온 우리 부부는 이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T.V. 를 보고 있었다. 아들이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뭐 해?
T.V. 보고 있단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봐, 보여줄 게 있어"
대문 앞 올리브 나무에 커다란 풍선이 걸려있다, 이 풍선을 터뜨려 푸른색깔의 종이가 쏟아져 나오면 손자이고, 핑크빛 색이면 손녀란다. 아들이 막대기로 풍선을 후려치니 푸른색종이가 쏟아져 내린다. 아들이 큰소리로 "엄마, 아빠 축하 합니다. 드디어 손자를 보게 됐네요"한다
이 대목에서 내가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분간이 안된다. 며느리가 임신을 하면 시어머니와 시 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축하를 해줘야 하는데 아들이 부모에게 축하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사자들은 다 알고 있으면서 우리 앞에서 쌩 쇼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얄밉기까지 했다. 기념사진을 찍잖다. 아들 옆에 서있는 엄마, 코끼리만 한 배불떼기 옆에 서있는 내 모습이 마치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어있는 격이다.
우리는 그들이 머무는 동안 대화다운 대화도 나눠보지 못하고 떠나보냈다. 막상 그렇게 보내놓고 나니 마음 한구석에서 "그래도 우리 집안에 새 생명이 찾아왔다는데 너무 박절하지는 않았나?" 하는 안쓰러운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 변덕스러울 줄이야. 곁에 있을 땐 따귀라도 한대 갈겨주고 싶더니만 떠난 뒤엔 배불때기에게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건네주지 못한 게 가슴이 아리다.
그들은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지 아들의 속내가 궁금했다. 애를 낳고도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살면 미국에서는 와이프가 아니라 girlfriend라고 부른다. 이 놈도 그럴 셈인가? 우리 사업장에 종업원이 애가 셋이나 있는데도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살기에 지금도 girlfriend라 부른다. 나는 종업원이 참으로 모질다고 생각했다. 애를 셋이나 낳아 주었고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와이프이기를 거부하고 girlfriend로 살기 때문이다.
출산일이 다가오자 아들이 엄마에게 전화하여 시카고로 와서 2-3주간 산모를 돌봐 달라고 부탁한다. 아무리 미워도 자식이다.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양년일지라도 산모에게 좋다는 미역을 바리바리 싸들고 시카고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안에서 "두 남녀가 결혼도 않고 동거하고 있는데 살고 있는 꼴이 오죽할까? 모르면 몰라도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애들 소꿉장난 하듯 살고 있겠지?" 했다.
에레베이터를 타고 15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화려한 신혼집이었다. 부엌에서 요리 중이던 아들 여자친구 April 이 배가 불러 끼우뚱 꺄우뚱 걸어 나와 우리를 반긴다. L.A. 우리 집에서 만났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이제는 이게 내 며느리다 싶다. 집안을 꾸며놓은 분위기가 우리 집과 흡사했다. 단정하고 깔끔한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각종 데커레이션마저도 와이프 스타일과 너무 똑같아 그만 나도 모르게 "여보 완전히 당신 스타일이야" 했다. 그녀가 집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우리를 안내한다. 여기는 안방, 여기는 태어날 우리 아가방, 여기는 홈 오피스. 안방으로 다시 들어가 붙박이 장을 열어젖히며 즐비하게 진열돼 있는 명품 가방, 신발, 드레스, 코트들을 자랑한다. 우리 같아서는 시부모에게 명품들을 보여주면 혹여 낭비벽이 심한 여자라고 못마땅해할까 봐 있는 것도 감추련만 의기양양하다. 역시 문화가 다른 서양 여자였다.
"아들아 Aporil 이 완전 명품녀 다. 너 돈을 많이 벌어야겠어?" 했더니
"아니에요, 모두 다 처녀 때 산 것입니다. 이제는 태어날 우리 아가를 위해서 돈을 쓸 거예요" 한다.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한다. 비록 김치, 된장찌개는 없었지만 나름 신경을 쓴 진수성찬이다. 누가 이 많은 음식을 요리했냐고 물었더니 야채샐러드만 아들이 만들었고 나머지는 April 이 만들었다 한다. 저녁상을 마치고서 차를 대접하겠다며 어설픈 한국말로 "커피, 유자차, 녹차, 생강차"중에서 고르란다. 우리 부부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국산차 들이다. 어데서 이들을 구했느냐고 물으니 가까운 곳에 대형 한국마켓이 있단다.
찻잔을 들고 15층에서 내려다본 시카고의 야경은 황홀했다. 어떻게 이런 곳에다 집을 구 할 생각을 했냐고 물으니 여기가 고급 주택단지란다. 분위기에 취한 탓인지 이제야 우리 네 사람은 말문이(대화) 터지기 시작했다.
아빠, 태어날 우리 아기 한국 이름을 지어 주세요. middle name으로 넣어주고 싶어요
그래? 좋은 생각이다. last name 은 누구의 성으로 할 예정이니?
당연히 내 성을 따라 Moon으로 할 겁니다.
둘이서 합의를 한 거야?
걱정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내일 법원으로 가 판사 앞에서 선서를 하고 혼인계약서에 싸인을 하려고 합니다. 예약을 해 놨어요. 애가 태어나기 전에 혼인신고를 해야지요.
그래, 아들아 고맙다. 나는 April 이 행여 girlfriend로 살까 봐 걱정했었단다
일의 순서가 바뀌기는 했지만 저희 두 사람은 앞으로 잘 살터이니 지캬봐 주세요
다음날 아침 아들과 April 이 정장 차림을 하고 집을 나선다.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니 이제야 의젓하고 멋진 부부처럼 보였다. 그래 태어날 새 아가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려고 애를 쓰는구나. 훗날에 손자가 커서 대화가 가능하게 되면 너네들의 뒤바뀐 순서를 고자질하고 말 거야
외출에서 돌아온 April 이 우리를 보고 활짝 웃으면서
"우리 오늘 결혼했어요
이제 제 이름은 April Moon 이에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