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내가 한국의 이민국을 찾을 줄이야
30년 만에 돌아온 고향의 공항문은 달랐다. 한국으로 오는 동안 기내에서 내 옆자리 손님과 한국말로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입국 심사대에 들어서면서 그분은 시민으로 나는 방문자의 문으로 헤어져야만 했다. 같은 하늘아래 살지만 긴 세월이 서로 다른 문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마음의 무게가 있었다. 그분은 기다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설레었겠지만 나는 긴장과 기대로 이 땅에 이방인으로 돌아왔다.
장기체류를 위해 법무부에 가서 거소증을 만들어야 했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사람이 법무부를 찾는 일이 평생에 한 번이라도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상당히 익숙하다. 미국에 정착키위해 영주권과 시민권을 만들려고 이민국을(법무부 산하) 몇 번이나 들락 거렸기 때문이다. 찾아갈 때마다 행여 일처리가 잘못되어 내가 원하는 서류를 받지 못하면 미국을 떠나야 한다는 위기의식에 늘 초조하고 긴장이 됐었다. 나의 편의를 위해 도움을 주는 곳이 아니라 나를 심사하는 곳이기에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나는 중구에 있는 출입국. 외국인청을 찾았다. 한국에도 많은 외국인이 들어와 살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북적 거리는 외국인청을 방문하고서야 실감했다. 영락없는 미국 이민국의 축소판이었다. 대기 손님들은 중국인, 필리핀인, 베트남인, 영어를 사용하는 서양인들로 가득했다.
오후 4시쯤 됐을 때 젊은 여자분이 나에게 손에 쥐고 있는 번호표를 보여 주면서 금일 중으로 서류접수가 가능하겠느냐고 묻는다. 업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대기자들이 많아 마음이 조급했던 모양이다. 비자기간이 금일 중으로 끝난다고 한다. 무슨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비자가 죽는 날 이민국을 찾아와 가슴을 조이고 있는지 안타까웠다. 나도 이곳은 처음이지만 그 여자분에게 "번호표를 받았으니 당신 것은 금일 중 처리해주지 않겠냐"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호출번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소 지쳐 있거나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비록 외국인이지만 마음만은 여기가 내 고향이라고 생각해서인지 한결 여유가 있다.
내가 살던 곳을 떠나면 우리는 신분이라는 것에 신경을 쓰게 돼있다. 태어나 자라면서 받은 시민권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못 가진 자들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다. 지금도 미국에는 영주권이 없어 신분이 불안정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한인들이 수십만 명이다. 꿈을 안고, 잘살아보겠다고 미국을 찾았지만 신분문제로 고용주 밑에서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부당한 노동착취를 당하면서도 호소할 길이 없어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이곳 이민청에서 만남 외국인들이 그들을 다시금 소환케 해 준다.
오늘 출입국사무소를 찾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오겠다고 가족들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인사하고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현실은 기대치만큼 녹록지 않다. 어떤 이는 고용주 밑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고국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할 때에는 “잘 있다고, 여기에 와서 이렇게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큰소리치며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미국 이민국에서 겪었던 과거들이 그들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들을 위로해주고 있다. "걱정 마세요. 다 잘될 겁니다. 마음이 초조할 땐 기도하세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겁니다."
30일 만에 거소증을 받고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조그마한 오피스텔도 얻었고 가족들의 도움으로 살림살이가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다. 가족은 수십 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금방 극복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동서, 처재, 조카, 동생들이 무언가를 도와주고 싶어 쓰다가 창고에 넣어둔 티브이도 갖다주고, 서랍장을 뒤지더니 수건도 챙겨 주면서 이런 것도 살려면 돈이 든다며 바리바리 싸준다. 세월이 흘러도 가족의 사랑은 마음속 깊은 곳에 조용히 숨 쉬고 있다가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주저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미국에서 살다가 돌아와 다시 한번 가족의 따뜻한 사랑의 온기를 느껴본다. 가족이 있어 외롭지 않고, 가족의 사랑이 있어 고향은 언제 돌아와도 엄마의 품처럼 포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