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화: 영문으로 된 인감도장
한국생활의 첫출발은 오래전에 개설했던 계좌에서 현금을 인출코져 은행창구를 찾는 일이었다. 미국은행과 비교하면 입구부터가 낯설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기계에서 번호표를 뽑아 순서를 기다린다. 처음인지라 기계 스크린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내하시는 분이 다가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다. 돈을 찾으러 왔다고 했더니 번호표를 대신 뽑아 주면서 1시간 정도 기다리란다. 순서가 되어 창구에 접근하여 통장과 도장을 내밀면서 출금을 원한다고 했다. 컴퓨터 스크린을 들여다보더니
손님 문 ㄴㅇ 씨는 사망하셨는데요
무슨 말씀 이세요?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는데요
돌아가신 걸로 나오는데요. 신분증을 보여 주시겠어요?
(주민등록증이 없어 미국 여권을 제시했다. 그때서야 감을 잡았는지)
아!, 외국으로 이주하셨어요? 미국 시민권자이시군요.
(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신분증에 이름이 영문이오니 통장도 영문이름으로 바꿔야겠어요.
도장은 한국명, 통장에 이름은 영어. 이래도 되나 싶었다. 그러나 괜스레 따져 묻다가 원하는 돈도 못 찾을까 봐 조용히 기다렸다가 꺼내준 돈뭉치를 움켜쥐고 잽싸게 은행문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서 피식피식 웃으며 걷고 있다.
"내가 사망했다고? 그럼 그동안은 말하고 웃고 걸을 줄 아는 좀비가 되었었네? 미국에서 한국까지 날아다니는 현대판 국제적인 좀비. 살아있으면서 죽은 남자였네."
행정의 유령이 되어 있다 다시 부활할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에서의 첫 경험이었다.
인감을 떼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여 주민센터로 향했다. 이름부터가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내가 이곳을 떠날 때는 "동 사무소"였다. 이곳 역시 번호표를 뽑아야 하는데 이제는 낯설지 않고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다. 인감을 신청했다. 컴퓨터와 내 여권을 보더니 밖으로 나가 영문으로 된 인감도장을 만들어 오라 한다. 영어로 된 인감도장? 영문이름이 Christopher Clinton과 같이 긴 이름은 어떻게 다 새길수 있을는지 매우 궁금했다. 아무튼 원하는 것을 만들어 갖다 줘야겠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와 상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여기에 도장 파는 사람 없어요?" 하고 묻고 다닌다. 평소에는 인터넷뱅킹도 하고, ChatGPT고 하고, GPS를 사용해 가며 세계 이곳저곳을 거침없이 돌아다닌 사람이 갑자기 30년 전의 한국을 찾아온 것처럼 길거리를 헤매고 다닌다. 길거리를 30여분 헤매다 도장을 마침내 만들었다. 내가 봐도 너무 엉성하다. 주민센터로 돌아와 도장을 보여주니 왜 이렇게 엉터리로 만들었냐며 짜증을 낸다. 그러면서 "할 수 없지요" 이거라도 사용하겠다고 한다. 서울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게 서툴고 상대방의 말 한마디가 내게 크게 다가온다.
“할 수 없지요 이거라도•••••”
순간 나를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는 한마디 "이거라도---"
그래 문제가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문제가 있지만 궁여지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인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 뜻을 헤아려 보려고 애를 썼으나 읽을 수가 없다.
인감은 나 자신을 증거 하는 일종의 징표다. 나 자신의 징표가 엉성하지만 어떻게 만들어 보겠다는 의미로 해석이 된다. "대한민국의 행정은 맘에 안 들어도, 엉성해도 가능한 건지?"
미국에서라면 어떻게 처리했을까 상상해 보았다. 마음에 안 들더라도 받아주는 일은 없다. 수용이 가능하면 Yes 불가하면 No 다. 맘에 안 들지만 해 주겠다는 게 나에게는 고맙게 여겨지기보다는 그분이 일을 정상적으로 처리한 건가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나중에 은행업무나 법무일을 처리하면서 문제를 제기하면 다시 만들라는 말까지 덧붙인다.
예전에 한국에 살면서 “봐준다 “는 단어에 익숙했던 것 같다. 변칙인 줄 알지만, 만족스럽지 않지만 당신과 나 사이를 생각해서 배려를 해주는 것. 매몰차지 못하고 별일이 없기를 바라는 요행으로 편의를 봐주는 습관이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를 잡았던 것 같다.
미국에서의 일처리는 매우 단호하다. 상대방의 하소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상대방과 대화 중에도 우리는 Yes 나 No를 선택토록 강요하는 흑백논리의 대화기법에 익숙해 있다.
이제는 내가 이런 대화법에 길들여져 와이프를 화나게 만든 적도 몇 번 있었다. 퇴근하여 저녁식탁에서 와이프와 얘기를 나누던 중 내가 묻는 말에 와이프가 에둘러 설명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Yes or No?" 로 대답하라고 다그친다. 와이프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무슨 대화가 그래요"하고 서운해한다. 그러나 미국사람들에게는 보통의 대화법이지만 우리는 전후사정을 들어보지 않고 왜 결론만을 강요하느냐고 못마땅해한다.
이런 문화의 차이가 벌써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나를 혼돈케 하고 있다. 호의처럼 포장된 불안이 나를 찝찝하게 만들고 있다. 고마움보다는 "이게 정말 맞는 건가?"라는 걱정을 지울 수가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