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현정의 뉴스쇼에 오은영 박사가 출현하여 요즘 사람들이 자녀를 안 낳는 이유를 '자녀를 소비재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즉 옛날 농경시대 때는 자녀를 집안 농사일에 보탬이 되는 노동력(생산재)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자녀를 낳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자녀를 출산하고 나면 이후로는 끊임없이 자녀에게 무언가를 지원해야 하고, 경제적으로도 투자 가치가 없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은 자녀를 소비재로 간주하여 출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놀라웠다. 난 내 자식들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소비재라는 개념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은영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는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모든 것을 효율성과 물질적으로만 판단하는 시대의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였다.
그러나 육아가 오로지 경제적 관점으로만 바라보아야 하는 일일까? 현대 시대에 육아를 그런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면 아마 자식 테크에 성공한 김연아나 손홍민의 부모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모들은 경제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 대부분 자녀 양육은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기보다는 손해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녀를 낳고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귀하고 축복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인간의 생명이란 그 자체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생명을 양육하는 일만큼 세상에 또 값진 일이란 없을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우리 사회의 소중한 구성원 한 명이 더 태어난다는 것은 온 사회 구성원이 감사히 여기고, 축복해 줘야 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물론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힘이 많이 드는 일이다. 처음 자녀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2시간마다 잠을 보채고 밤 수유를 찾느라 부모가 체력적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진다.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를 위해 부모는 자신의 시간을 다 바쳐야 하고, 때론 자신의 삶을 포기한 채 온 신경을 육아에만 집중해야 한다.
자녀가 커 가면 또 어떠한가? 부부가 맞벌이일 경우 자녀를 돌봐줄 사람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사설 돌봄 업체까지 찾아야 하는 게 현실이고,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부모가 퇴근하기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해 아이들을 방과 후나 학원에 하루 종일 맡겨야 하는 게 현실이다. 심리적으로도 지치지만 이리저리 경제적으로도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자녀의 부모는 회사에서도 눈치가 보인다. 부모는 아침에 보채고 일찍 오기를 기다리는 자녀가 눈앞에 아른거려 바쁜 회사 업무에 계속 집중하기가 어렵고, 늘 퇴근 시계만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이런 부모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에 집중하라고 눈치를 주고, 육아시간도 함부로 쓰지 못하게 강요한다.
하지만 이런 많은 어려움에도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있어 여러 의미가 있는 일이다.
우선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나에게 없던 이타심이 생기고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타심이란 무엇인가? 바로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하는 마음을 의미하는데 실제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보다 자녀의 삶과 행복을 우선한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자녀에게 먼저 주고, 소중한 것이 있으면 자녀에게 먼저 양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또 위험하거나 어려운 일이 자녀에게 들이닥쳤을 때는 자녀가 고통 속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고통을 대신 겪기를 바라는 것도 부모의 마음이다.
실제 자녀가 태어나기 전에는 나도 나밖에 모르는 존재였다. 하지만 자녀의 탄생은 나의 이런 마인드를 180도 바꿔 놓았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지만 그 자체로 소중한 아기 앞에서 나의 시간은 오롯이 자녀와 함께가 되었다. 배변을 갈고, 아기의 울음소리에 깨어서 분유를 먹이고, 또 아기랑 계속해서 눈을 마주치는 과정속에서 아기의 삶이 곧 내 삶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기가 잘 먹고 잘 자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지고 행복해졌다. 어느새 점차 자녀를 위한 이타적인 나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교사인 내가 학생들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그전까지 나는 그저 학교 규정대로, 원리원칙대로 아이들을 대했다. 조금이라도 눈 밖에 나는 아이가 있으면 이해를 하지 못했고, 때론 아이들을 감정적으로 혼내고 나무라는 일도 많았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후 학교에 돌아왔을 때 수업시간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들도 태어났을 때 부모가 얼마나 사랑하고 소중하게 아꼈을까. 아이들 각자가 지금도 가정에서는 하나하나 우주 같은 존재일 텐데, 내가 아무리 교사라지만 저 아이들을 함부로 다뤄서야 될까.'
그때부터 난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비록 가정에서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애정을 쏟고 인격적으로 대해야겠다고 마음먹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관점은 밖에서 아동들을 보는 관점으로도 확장되었다. 그전까지 나에게 아동이란 말썽꾸러기에 귀찮고 성가시기만 한 존재였다. 하지만 아이들 각자가 부모의 헌신과 사랑을 받으면서 키워진 소중한 존재란 것을 알게 되면서 아이들에게 양보하고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비로소 내가 어른이 된 순간이었다.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와 함께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전까지 나는 아이들 놀이나 아이들 문화에는 대체적으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놀이동산, 키즈카페, 동물원, 수영장, 썰매장, 과학관, 박물관 등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어느새 아이들 일상이 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어디서 그런 열정이 샘솟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주말에는 집에서 쉬기 바빴던 내가 금요일 밤에는 수시로 아이들 갈 곳을 검색하고, 주말 아침에는 짐부터 싸고 있는 부지런한 아빠로 변해 있었다.
주말에 야외 장소에서 마주치는 부모들 표정은 대체로 행복해 보였다. 야외 장소에서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동요에 흥겨워하며 따라 부르는 부모도 있었고 아이들의 뛰어다니는 모습에 박수를 치며 밝게 웃는 부모도 있었다. 피크닉 장소에서 아이와 부모가 서로 음식을 입에 넣어주며 까르르 웃기도 했다. 또한 새로운 볼거리나 새로운 체험거리에는 부모도 아이와 함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늘 주말 하루가 밝고 즐거운 나날이었고 새로운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아이의 행복을 발견했고 나도 행복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아이가 없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가족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도 뜻한다. 한편으로 자녀가 생겼다는 것은 퇴근 후 나를 반겨 줄 가족이 그만큼 더 늘어났다는 것을 뜻했다. 업무에 지치고 많은 스트레스가 쌓인 채 퇴근했을 때 아이들은 현관 앞에서 쏜살같이 달려와 "아빠 수고했어요." 하며 나에게 안겼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는 평온이 찾아왔다. 또한 학교에서 쌓였던 스트레스와 피로도 자연스럽게 녹아내렸다.
"이런 것이 가족이 가져다주는 편안함과 행복감이구나." 나는 여러 번 만족할 수 있었다.
자녀가 태어났다는 것은 조부모 세대에게도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그동안 나는 본가든 처가든 갈 때마다 어르신들과 서로 할 말이 없어서 뻘쭘한 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손주가 생겼다는 것은 어르신들에게도 큰 기쁨과 할 일거리, 대화거리를 제공했다. 어르신들은 천진난만한 손주들과 대화를 나누며 기뻐했다. 또한 나도 어르신들과 육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것을 배우고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미움받을 용기>에 따르면 사람이 우울함을 느낄 때는 더 이상 자신이 타인이나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기여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낄 때라고 한다. 하지만 가족은 이런 우울함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고 나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어 내가 나이가 들어서 다 큰 자녀들을 독립시키고 직장도 퇴직하였다고 생각해보자. 일순간 내가 할 일들은 이제 끝났구나 하여 우울함이 몰려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라는 존재가 아무 쓸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젊은 시절 자녀들에게 주었던 사랑만큼 자녀들은 독립 후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나는 자녀들에게 여전히 정서적 안식처가 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나는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삶의 동기를 북돋아주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해 준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특히 30대가 되면 신체적인 성장은 멈추고 우리 몸은 조금씩 퇴화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녀는 이제 갓 자라난 새싹이다. 알게 모르게 키가 쑥쑥 자라나고 골격이 발달하고 정신적으로도 아는 것이 많아지고 똑똑해진다. 부모는 이런 자녀의 성장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존재다. 내가 주었던 사랑만큼, 또 내가 가르치고 알려준 만큼, 자녀가 잘 자라는 것 같아 부모는 뿌듯해진다. 이런 자녀의 성장은 부모에게 현재까지 육아하고 있었던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일깨워준다. 또 자녀를 위해 여전히 자신은 할 일이 많다는 삶의 동기를 일깨워준다.
물론 거울 이론처럼 자녀는 부모의 꼭 좋은 점만 닮아가는 것은 아니다. 때론 부모의 잘못된 습관이나 부모의 잘못된 말투까지 아이들은 답습한다. 이 과정에서 부모는 아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아이의 모범이 되기 위해 보다 성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육아를 꼭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까?
육아는 여러모로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다. 육아의 끝은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라고 하는데 때론 자녀가 성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부모와 같이 사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런 육아를 꼭 효율성과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해야 할까?
예전 캐나다에서는 자신을 위해 돈을 쓸 때와 타인을 위해 돈을 쓸 때 누가 더 행복한지 알아보는 실험이 있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타인을 위해서 돈을 썼던 이타적인 사람들이 더 큰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고 만족감이 컸다고 한다. 또한 대체로 남을 돕고자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우울감과 불안 수준이 낮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더욱 희망적이었다고 한다.육아는 이타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이타적인 일을 함으로써 사람은 혼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행복감과 보람, 성취감과 희망을 느낄 수 있다.
나이지리아 속담에는 아이 한 명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온 마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부모는 그런 아이를 키워내는 일의 가장 중심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존재다. 예전 학교의 여선생님들과 커피를 마시다 자신이 태어나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많은 선생님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아무래도 우리 00이 낳고 00이가 지금까지 잘 자라준 것 아닐까요? 부모가 되고 나니 자식을 키우는 것만큼 보람찬 일은 없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