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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은 나쁘지 않다 그걸 모른척 하는 제도가 나쁠 뿐

by 한동훈

학군지 고등학교에서 5년간 근무하며 항상 가졌던 의문이 있었다. 그건 바로 아이들이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는 12월만 되면 상급학년 문제지를 풀며 선행학습을 하고 있다는 불편한 사실이었다.


"애들아 선행은 좋은 것이 아니야. 차라리 그 시간에 기초를 탄탄히 하기 위해 지난 학기 배웠던 것을 복습하는게 더 유용해. 선행할 시간에 기존 교과서나 문제지를 다시 풀어봐."


라고 선행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이야기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선행학습을 하였다.


처음에 나는 이를 단순히 학원에서 시켜서 하는 줄로만 알았다.


'아무리 돈이 중요해도 그렇지, 공교육에서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선행을 버젓이 시키고 있다니...에잇 나쁜 학원들 같으니.'


나는 혼자 속으로 학원(사교육)을 나쁘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니 선행은 일부 중상위권 아이들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학급에서 1-2등 하고 있는 최상위권 아이들도 가릴 것 없이 선행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학군지 학교의 겨울은 늘 그랬다. 12월-2월 사이 기간은 학군지 아이들에게 휴식과 재충전, 복습의 시간이 아니었다. 학업을 포기한 일부 아이들을 제외한 대부분 아이들이 선행에 목을 메고 있었다.


대체 아이들은 왜 이렇게 선행에 목을 매는 것일까? 이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갖고 몇년 간 지켜보았다. 그리고 5년차, 이제 학군지 학교를 떠날때 쯤이 되어서야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1. 학기 중에는 정상적으로 새로운 것을 공부할 시간이 없다.


우리학교의 커리큘럼을 보면 3월부터 12월까지 192일간 학업이 진행되지만 실제 수업 진도를 나가며 정상적으로 수업하는 날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특히 고등학교에서는 시험기간이 많은데 일주일(5일)을 지필평가 시험기간으로 잡았을 경우 지필평가(1년 총 4번)기간 20일은 실제 수업을 할 수 없게 된다.


지필평가를 전후한 기간도 무시할 수 없다. 통상적으로 시험 보기 일주일 전은 아이들에게 시험에 대비하라고 교과교사가 자율학습을 주는 경우가 많다. 또 지필 시험이 끝나고 그 다음 하루, 이틀 수업시간도 서술형 정답 확인이나 본인 점수 확인 때문에 진도를 나갈 수가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수행평가를 위해 실제 수업 진도를 못 나가는 경우도 꽤 된다. 나의 경우 아이들에게 개별 발표 수행을 시켰는데 이 때문에 실제 50분 수업 중 15분은 수행평가에 할애해야 했다. 그 외에 2박 3일의 현장 체험학습, 체육대회, 자율 진로활동 등으로도 학기 중 빠지는 시간이 꽤 많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교사 입장에서는 1학기 때는 3,4,6월 2학기 때는 9,11,12월에 수업 진도를 집중적으로 몰아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즉 아이들 입장에서는 특정 달, 특정 기간에 수업 진도가 정신없이 쏟아지다 보니 이를 복습-되새김질 할 시간도 없고, 배운 내용 중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생기면 이것들이 누적되어 결국 성적하락으로 이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학기 중에는 기본적인 공부 외에도 수행평가, 모둠학습, 프로젝트학습, 학교행사활동, 친구들 관계 관리 등으로 무척 바쁘다.


현실적으로 아이들 입장에서는 방학 때 다음학기 배울 내용은 한번은 공부하고 가야 정상적으로 수업 진도를 따라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한번 선행은 해야만이 뒤처지지 않고 내신관리를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수업 과정은 단순히 배움과 지식 이해가 전부가 아니다. 거기에는 대입과 내신 1등급을 따기 위한 아이들끼리의 치열한 경쟁과 보이지 않는 견제가 숨어있다.


더구나 고등학교 교과 내용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난이도가 올라가고 한번에 이해하기가 어렵게 된다. 피아노나 자동차 운전은 여러번 반복해야 숙달이 되는데 이는 교과 지식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접하는 것과 두번째 접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특히 교과 지식을 두번째 접하게 되면 상위권의 경우 익숙해져서 기본적인 내용 뿐만 아니라 보다 심화된 내용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학교 시험 문제는 상위권 변별을 위해 10-30% 문제는 심화 문제로 나오게 된다. 한번보다는 적어도 두 번 이상은 접해본 즉 선행을 한 상위권 아이들이 유리할 수 밖에 없다.



3. 이런 상황에서 선행 금지법이 무슨 소용있나?

이런 와중에 정부에서는 공교육 종사자들에게 선행학습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있다. 이에 말 잘 듣기로 소문난 교사들은 이를 철통같이 지키며 수업 때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학교생활기록부에도 선행 관계된 내용이 적혀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한다.


그런데 그러면 뭐하나? 사교육계에서는 공교육의 이런 공백과 학생 학부모의 불안을 이용해서 버젓이 선행학습을 시키고 있는데. 자식을 둔 내 입장에서도 현재와 같은 상대평가와 대입체제 방식이라면 사교육을 통해 선행을 안 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 대해 정부는 그저 팔짱만 끼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 이게 과연 누구 좋으라고 하는 것일까?

과연 정부는 이 문제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필요 이상으로 사교육비가 굉장히 많이 드는 나라이다.


이는 자식들이 높은 학력을 가지게끔 만들고 싶은 한국 학부모들의 욕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본질적으로 교육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그저 공교육만 통제 억압하고 있는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제도 때문이기도 하다.


매번 정부에서는 과도한 사교육비와 지나친 입시 경쟁 위주의 교육을 막는다고 대책을 발표하지만 이는 결국 공교육에 대한 강제와 억압으로 관철될 뿐이고, 내성이 생긴 사교육계는 정부 발표의 허술한 점을 파고들어 또다시 학생 학부모를 공략한다. 그리고 불안 마케팅에 학생 학부모는 또다시 사교육에 의존을 안할 수 없게 된다.


선행 금지법은 분명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과열된 입시 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다. 그런데 이 제도는 취지와는 달리 공교육을 비정상적으로 묶어놔서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과열된 입시교육을 개선하기는 커녕 더욱 학생 학부모들이 사교육에 의존하게끔 만들어 놓았다.


공교육 교사인 나는 오늘도 아이들이 학원에서 가져온 선행학습 문제지를 풀고 있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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