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푸아의 경계자들
남성이 머무는 곳은 겉보기와 달리 꽤나 넓은 공간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 개의 집의 벽을 부수어 합친 것만 같았다. 각각의 이음새들이 엉성하지만 내부를 차지하고 있는 목재 골격들은 단단해 보였다. 와이어트가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의 목재들이 소리를 내었다. 넓은 내부에는 세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청년이 자연스럽게 중앙에 놓인 테이블로 그를 안내했다. 와이어트는 그를 따라 점점 안 쪽으로 다가갔다. 중앙에 놓인 목재 기둥 너머로 구석에 위치한 찻장이 보였다. 선반에는 한눈에 봐도 많은 술병들이 놓여 있었고, 그 앞엔 마치 바텐더가 서 있을 것만 같은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주변은 잘 정돈되어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와이어트는 한쪽 벽에 걸려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먼지와 흙이 뒤덮여 엉망인 꼴이었다.
“혹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세수를 좀 하고 싶어서요.”
와이어트의 요청에 청년은 흔쾌히 손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와이어트는 문을 닫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의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자신이 저지른 이 모든 일이 얼마나 현실감 없고 놀라운 것인지 피부로 와닿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사내에게 인사를 건네고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건물을 나서야 했다. 그러고 숙소로 돌아가 맥주 한 병을 마시며, 며칠 뒤 돌아오는 닐스에게 웃으며 얘기하는 걸로 미무리될 수 있었다. 아니 닐스에게조차 말하지 않는 것이 옳을 수도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찬물이 그의 손등에 맞닿았다. 차가운 감각이 그의 상처 난 피부표면에 스며들어 아찔한 통증을 유발했다. 그의 팔에는 조그만 상처들이 가득 퍼져 있었다.
역시 더러워진 얼굴에 물을 끼얹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반사된 그의 얼굴이 낯설게 다가왔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 위를 덮고 있는 수염, 그리고 날카로워진 인상.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시에, 와이어트는 낯설기만 한 자신의 얼굴로부터 어딘가 익숙한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잊고 싶었던 과거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황토색 건물들이 가득한 그곳은 버스도 택시도 존재치 않았다. 오직 공항 하나만이 존재했고,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사고로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더욱 그러했다. 그는 떠올렸다. 다정한 언어와 품위 있는 행동을 지녔던 아버지를. 말똥한 눈으로 쳐다보는 와이어트에게 그는 늘 말하곤 했다. “자식은 부모의 성격을 닮는단다.” 그럴 때마다 와이어트는 신나게 자신의 미래를 꿈꾸곤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숨을 들이마쉬는 법을 잊어먹은 듯했다. 쉬지 않고 내뱉는 기침 소리가 와이어트의 가족이 머무는 집을 가득 채웠다. 가족을 둘러쌓던 웃음소리는 사라졌고, 병원비는 그들을 짓눌렀다. 그의 어머니는 그것이 남편의 직장과 관련이 있음을 확신했다. “비료공장에서 나오는 독성이 남편을 죽이고 있어요!”. 소리 높여 외쳤지만, 그녀의 말을 쉽사리 믿어주는 이는 없었다. 타인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을 뿐이다.
그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와이어트는 성격 대신 그들이 보여준 세상을 넘겨받았다. 진실이라는 것이 언제나 권력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와이어트는 그때 배웠다. 그와 어머니 그리고, 소중한 이웃들이 외치던 시위소리.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섞인 표정들이 연달아 그를 괴롭혔다. 와이어트에게 고향은 이제 상처만을 상기시키는 장소였다. 덧붙여, 그는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기억마저 잊으려 노력했다. 거기엔 추억보다 고통이 더 짙게 남아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와이어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새삼 놀라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던 부모님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삶이 준 고통의 그림자가 얼굴에 그늘져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건물에 한 남성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새로운 남성은 의자에 앉아있다 와이어트를 보곤 자리에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고마워! 나는 무섭이라고 하네. 나의 형제를 구해줬다는 이야기를 방금 전해 들었어. 이거 뭐, 어떻게 사례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
사내의 얼굴은 꽤나 남성적이었다. 짙은 눈썹과 오뚝한 코, 그리고 하관의 절반을 덥고 있는 거친 수염이 그러했다. 와이어트보다 한참 큰 키와 균형 잡힌 근육들도 그러한 인상에 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고 보니 서로의 이름도 이야기하지 않았네요. 제 이름은 야루에요.” 여전히 절뚝거리는 남성이 와이어트에 다가오며 말했다. 야루는 손에 든 물컵을 와이어트에 건네었다.
“와이어트라 합니다.“ 그는 물을 마시고 침착하게 말했다.
“우선 의자에 앉게. 혹시 담배 피우나?”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가 말했다. 와이어트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담뱃갑이 테이블 표면을 따라 미끄러져 그의 앞에 멈췄다.
곧, 담배 연기가 방안에 뿜어져 가득 찼다. 그들은 와이어트에게 궁금한 점이 많은 듯했다. 와이어트는 차분히 그리고 과분하지 않게 자신에 대해 설명했다.
“호주에서 인도네시아에 대해 공부한고요? 어쩐지 너무 말을 잘하신다 했어요.” 야루가 낄낄대며 웃었다.
“자네가 공부한다는 대학은 좋은 대학인가? “ 무섭이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와이어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할 내 여자친구도 대학을 다니고 있어. 수라바야 대학교에서 말이야. 정말 나한테 과분한 여성이야.” 무섭이 흥분하며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가 대학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꽤 자랑스러운 듯했다.
“수라바야 대학교라면… 혹시?” 와이어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맞아. 제기랄! 대학생이라는 자들이 그렇게 비겁한 놈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무섭이 다리를 쾅, 내리찍었다. 목재가 찌그러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역시나, 옆에서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던 야루는 무섭의 모습을 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결혼할 여성이라니 킥킥! 그녀의 아버지가 들으면 길길이 날뛸게 눈에 벌써 선하구만!”
무섭이라는 남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와이어트에 파푸아를 벗어나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설명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야루는 신난 듯 말을 덧붙였다.
“무섭이 좋아하는 여자는 꽤나 부잣집 따님이거든. 뜨거운 태양 아래서 땀 흘려 노동하는 사위가 퍽이나 마음에 들겠어?”
이 말을 들은 무섭이 날카롭게 야루를 바라보았다. 야루는 한순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우리의 결혼이 문제가 되는 건 우리가 같은 가문이라는 거지. 빌어먹을!”
무섭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책상을 내려쳤다. 그는 자신과 그녀의 여자친구의 가문이 20년 전 합쳐졌다는 것이 분통하다는 듯이 울분을 터뜨렸다.
그때, 누군가가 닫혀있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순간, 긴장된 분위기가 그들을 덮쳤다. 그들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들어온 이를 살폈다.
“다들 무사히 돌아왔네.”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와이어트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재즈클럽에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성, 렉시였다. 와이어트는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를 응시했다.
렉시는 낯선 상황에 당황한 듯 경계의 눈빛으로 와이어트를 쳐다보았다. 야루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절뚝이며 다가갔다. 야루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렉시는 조용히 와이어트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죄송해요. 잠시 당황해서요. 우리 한 번 뵌 적 있죠?” 렉시가 말했다.
“에, 재즈바에서…” 와이어트가 곧바로 대답했다. 무섭이 가져온 물을 마시며,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무섭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술병을 가리켰다.
무섭이 몸을 움직임과 동시에, 수많은 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경계심이 섞인 시선이 와이어트에게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와이어트는 이제 떠나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머뭇거리며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 위에서 이전의 표정이 덧대어 보였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고의예요.’ 그날의 실수가 다시 재생되는 듯했다. 내면의 요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서서히 움직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가는 와이어트에 렉시가 다가왔다.
“고마워요, 제 아이를 구해줘서.”
아이라고? 와이어트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아이를 갖기엔 앳된 여성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파푸아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짙게 칠한 마스카라에도 가려지지 않는 아름다운 눈과 그 속의 에메랄드 색채의 동공, 그리고 날렵한 턱과 코. 무엇보다 금발의 머리색과 새하얀 피부가 그러했다. 분명, 무대 위의 그녀와는 다른 또 다른 매력이 존재했다. 또다시 와이어트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에 홀려버렸다.
“이번엔,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그의 물음에 렉시가 미소 지었다.
“제 아이를 구해주신 대가일까요, 아니면…”
“당신의 마음이요! 그게 가장 중요할 겁니다...” 와이어트가 다급히 대답했다. 웃음을 터트린 렉시는, 잠시 후 자신의 휴대전화를 그에게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