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푸아의 경계자들
급하게 몰아치던 장대비가 멎은 퀸즈랜드 대학교 캠퍼스는 햇빛을 머금은 채 숨을 쉬고 있었다. 며칠 만에 햇빛인지. 한 달 동안 방에만 있던 와이어트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회색빛 구름이 천천히 흩어지면서, 젖은 나무들과 잔디밭은 빛을 머금은 채 더 깊고 짙은 녹색으로 숨을 쉬었다. 하지만 와이어트의 시선에 비친 풍경은 모든 색이 빠져나간 듯 잿빛이었다. 건물 외벽을 따라 흐르던 빗물이 아직도 맺힌 채 빛을 반사하고, 길모퉁이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젖어 흐려진 구호와 포스터의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젖은 아스팔트와 벽돌길에 남은 물웅덩이들은 그의 발소리에 파문을 일으켰지만, 그는 그 소리마저도 멀게 느껴졌다. 플라타너스 가로수 밑에는 떨어진 잎이 비에 눅눅히 젖어 매트처럼 깔려 있고, 하늘은 비가 모두 쓸어내린 듯이 유난히 속 보이게 저물고 있었다. 캠퍼스 위에는 여전히 이전의 열정이 잔상처럼 어딘가 머물러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완전히 사라질 듯 위태롭고 덧없이 느껴졌다.
한때는 커다란 함성과 메가폰의 울림, 수십 명의 학생들이 목청을 높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던 그 장면을 되뇌었다. 그는 량이 서 있었던 자리로 걸어갔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다가 분주히 뛰어다니며, 분노를 토해내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다시 그는 옆으로 움직이고 주변을 살폈다. 고함을 치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동양인 남성을 떠올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남들이 보았을 자신의 뒷모습을 상상했다.
마치 유령처럼, 그는 텅 비어버린 광장을 한참이나 서성였다. 처음 마노콰리의 땅을 밟았을 때처럼,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것만 같았다. 낯선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이해하는 자신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광장을 벗어나 그는 계속해서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정처 없이 걸었을까.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려던 찰나, 눈앞에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이다와 그 옆에 케빈이 보였다. 와이어트는 급하게 몸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멀리서 그를 알아본 아이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부끄러웠다. 이번엔 도망치지도 못 한 자신이.
캠퍼스 내 카페에 앉은 아이다는 와이어트를 반가운 눈으로 맞아주었다. “언제 돌아온 거야?”
와이어트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얼마 안 됐어. 일주일 정도.”
와이어트의 턱 아래를 손으로 부드럽게 잡은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많이 변했네.”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햇빛을 많이 받았나 봐.” 그녀가 옆자리에 앉은 케빈을 바라보며 웃었다. 케빈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끄덕였다.
커피가 그들에 테이블 위에 놓이자, 커피 향이 코를 찔렀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시끌벅적한 카페 안 소음 속에서 유모차에 잠든 아이에게 고정되었다. 새근거리는 아이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평온한 아이의 얼굴과 아이다, 그들을 향한 케빈의 다정한 눈빛은, 그의 내면에 있는 깊은 공허와 날카롭게 대비되었다. 아이의 이름을 물어보는 와이어트의 질문에 “타일러로.” 케빈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짙어진 다크서클에도 그의 인상은 부드러워진 것만 같았다. 와이어트는 변한 그의 모습에서 자신과 같은 무게를 짊어진 흔적을 읽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돌아갈 수 없는 평범한 삶의 궤적을 목격하며 소외감을 느꼈다.
“어떻게 지냈어? 파푸아는 어땠는데?” 아이다가 몸을 흔들며 신난 듯이 얘기했다. 고된 육아 속에 그녀만의 일탈인 듯했다. 와이어트는 잠시 접어뒀던 파푸아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끔찍한 감정이었다. 그저 그랬다는 말로, 그는 얼버무렸다. 와이어트의 시큰둥한 대답에 아이다는 잠시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팔꿈치로 케빈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러자 케빈이 와이어트를 쳐다보며 우물쭈물했다. 그의 자세는 퍽 어색해 보였다. “사과할게.” 케빈이 말했다.
와이어트는 고개를 뒤로 빼며, 의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추임새를 넣는 아이다의 옆에서 케빈이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배신자.’ 와이어트가 두려워하던 단어가 다시 케빈의 입가에서 울렸다. 케빈은 자신이 오만했다며,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나 와이어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도망치지 않을 수 있을까?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대!” 와이어트의 표정을 연신 살피던 아이다가 과장되게 웃었다.
그런 아이다의 태도가 안쓰러운 듯, 와이어트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민폐였어, 너희 모두에게.”
“너무 자책하지 마.” 그녀답지 않은 낮은 목소리가 아이다로부터 나왔다. “민폐라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와이어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허리를 굽혀 그를 마주 보았다.
“진심이야. 호기심과 열정이 담긴 눈빛이 나는 부러웠거든.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 했던 것도 있고.”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실수란 건, 누구나 하는 것이라며 그녀는 와이어트를 위로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누군가는 네가 보여준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는 것도 알아주면 좋고.”
아이다의 말에 와이어트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이 허공을 응시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는지는 스스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닌지도 몰랐다. 마음에 얹혀있던 무거운 무언가가 덜어지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아이다가 량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량. 와이어트는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그의 물음에 아이다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잠시 시드니에 있는 가족한테 갔어. 아마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돌아올 거야.”
와이어트는 마음이 한결 놓였다. 동시에, 학교로 돌아온 그녀가 걱정되었다.
커피를 마시며 아이다는 자신의 이야기도 털어놨다. 일 년 정도는 쉴 예정이라며, 털털하게 웃었다. 와이어트는 유모차 옆에 고개를 돌렸다. 작은 손가락이 이불을 꼭 쥐고, 천진난만한 숨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아이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가슴 한구석이 아득해졌다. 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아이다의 말이 이어졌다. “아이 때문만은 아니야.”
그 한 마디에, 와이어트의 심장이 멈칫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담담히 고개를 돌린 아이다의 눈빛이, 수많은 질문을 덤덤하게 견뎌낸 사람처럼 단단했다. “그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작은 언론사를 만들었어. 량과 같은 문제를 겪는 친구들을 도울 수 있게.” 아이다의 손끝이 공중을 맴돌았다.
“계속하는 거야?”
“당연하지. 사람들도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줘서, 요즘은 꽤 바쁘게 지내.”
그 말이 떨어지자, 와이어트는 가슴에 얹혔던 무언가가 덜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들을 버리고 도망쳤던 죄책감. 더 나아가, 이들이 가진 열정은 내가 추구하는 목표에 비해 더없이 가볍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가치는 지극히 부끄러운 종류의 것이었다. 이곳, 브리즈번에도 꺼지지 않는 촛불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그는 이전에 아이다에게 물어봤던 것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맞아, 예전에 내가 한 번 물었었지.” 와이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다는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노을이 번진 창문 너머, 둘만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아이다의 시선이 먼 곳으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깊어졌다. 한참 후에야,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아마도 타일러에겐 좀 더 나은 세상을 전해주고 싶어서.”
와이어트는 숨이 턱에 걸린 듯 고개를 숙였다. 그가 목소리를 이으려는 순간, 아이다가 비틀거리며 웃었다. “너무 유치한가?” 와이어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잠시 텅 빈 유리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와이어트가 말을 꺼냈다. 자신이 보고, 겪고, 느낀 것을 하나씩. 아르팍 산과 시위 그리고 렉시에 관해서였다. 그의 어조에는, 어쩌면 그녀가 이 모든 것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란 일종의 기대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순진한 착각이라는 듯, 아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와이어트. 너에게 이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어.” 아이다가 케빈을 바라보며 미소를 보이자, 그는 타일러를 품에 앉고 자리를 일어섰다.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내가 타일러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정말로 혼란스러웠어. 나와 케빈은 마냥 새 생명을 축복하기엔 준비가 되지 않았었잖아?”
아이다의 말을 듣던 와이어트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취업 상담 일정, 포스터와 인턴 면접 약속 같은 것들을 벽에서 떼어냈어. 모두 참 부질없는 짓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가졌던 꿈과 지난날의 열정이 찢어진 종이조각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거든. 믿기지 않겠지만, 그때 네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어. 다시 만난 너의 표정은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종류였어. 파푸아에 가게 되었다며,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겠다란 희망이 선명하게 드러났지. 난 아직도 힘에 부칠 때마다 내가 보았던 그 당시 너의 눈빛을 떠올리곤 해.”
호흡을 돌리 듯, 아이다가 잠시 커피를 입에 머금고 말을 이었다.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순 없지만, 이 문제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이 들어. 떠나기 전 품었던 감정과 생각을 잊지 말고, 너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봐.”
와이어트가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리고 그는 카페를 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
자신의 방 안에 놓인 책상 앞에서 와이어트는 공책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씩 적어갔다. 흰 여백이 까만 글자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8월 17일 토요일, 마노콰리 시 지역 의회 건물 앞에서 웃통을 벗은 남성을 뒤로 수 백명의 사람들이 항위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얼굴 대부분에 푸른색과 흰색이 번갈아 칠해져 있으며, 붉은색 배경에 흰색 별이 양 볼에 그려져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이토록 항의하는 것일까.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의 끝엔 그들이 상징하는 국기, 모닝스타(Bintang Kejara)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중얼거리며 천천히 그리고 또렷이 글을 써 내려갔다.
『“우리는 원숭이가 아니다.” 파푸아 내 학생들을 향한 선생의 인종차별적 언사로부터 촉발된 시위는 일주일 전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행해졌으며 비슷한 시기에 파푸아 공항은 시위에 의해 마비되었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조코 위도도는 그들에 평화적인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으나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시위는 또다시 일어났다. 사실, 일주일이라는 시간 정도로 해결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문제 너머로 파푸아라는 지역 사람들 마음속엔 오랜 핍박과 불평등 그리고 반강제적인 압박을 향한 저항의 씨앗이 뿌리 깊게 박혀 자라왔기 때문이다.』
와이어트가 또다시 중얼거렸다. 그가 이전에 보았던 한 글귀였다. “인류학적 침묵으로까지 묘사되는 이곳은 과연 알아볼 가치가 없는 곳일까?”
서론을 마무리한 와이어트는 몸을 뒤로 젖히며 의자를 삐걱이게 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다시 펜을 쥐었을 때, 꽉 잡은 탓에 손가락 마디 주변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제부터 그는 찢어버린 노트에 남겨두었던 기억을 복원해야만 했다. 닐스와 함께했던 아르팍 산맥의 기억, 아욕이 남긴 말들. 단순한 기록이 아닌, 그 행동과 언어 속에 담긴 진의를 해독하는 과정이었다. 만스렌 망운디, 그들을 구원할 계승자들. 그리고 교회. 렉시가 아이를 구한 장소이자, 억압 속에서도 그들이 믿고 생을 이어가는 공동체의 심장부. 그가 교회에서 목격한 것은 단순한 신앙이 아닌, 실존적 투쟁의 현장이었다. 그의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출입국 사무소 남자의 눈빛, 진실을 감춰야 했던 자신의 모습, 택시 창밖을 때리던 시위 소리. 목격했던 현장의 분노와 설움, 그 모든 의미를 적어 내려가야 했다. 아르팍 산 아래, 트럭과 인부들로 가득했던 길목이 떠올랐다. 분노와 슬픔에 찬 주민들. 그리고 안전모를 쓴 관리책임자. 수많은 민족을 통제해야 하는 그들의 고충과 억울함까지도 글이 되어 공책에 기록되었다.
와이어트는 마지막으로 노트를 펼쳐 '정서적 요소'라 적었다. 아이다의 눈빛, 렉시가 아이를 안던 순간, 창을 겨누던 아이들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그의 머릿속을 휩쓸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학문적 언어로 번역하려 했다. 그러나 펜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모성애, 사랑, 공감. 단어들은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렉시가 그에게 보여준 감정의 무게를 담아낼 수 없었다. 그의 호흡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펜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기존의 학문적 논리로 풀어낼 수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직면했다.
서로의 일처럼 돕는 아이들의 모습은? 수라바야에서 벌어진 일에 발 벗고 나선 시민들은?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고 있는 듯했다. 베네딕트 교수의 파이프가 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치 눈앞에 별을 두고도 마땅한 이름을 찾지 못한 듯, 그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놓인 듯한 감정을 느꼈다.
파푸아를 둘러싸고 있는 감정적 연결고리는 그의 마지막 열쇠였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휴대전화를 들어 닐스의 번호를 눌렀다. 언제나처럼 활기찬 닐스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를 채웠다. "무슨 일인가?"
"만약, 만약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마주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고, 풀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닐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전해졌다.
"내가 말했잖나! 멀리 있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다시 묻겠네. 이제 와이어트 군에게 가장 가까운 곳은 어디인가?”
그는 인터넷으로 마노콰리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 시간을 검색했다. 내일 정오쯤에나 가능했다. 몸에 남은 여운을 떨쳐내지 못한 채, 그는 천천히 팬톤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브리즈번 강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 곳까지 이르러 있었다. 풀숲 위로 가로등의 주황빛이 길게 드리워졌다. 도시의 불빛이 강물 위로 뭉개져 내려앉았고, 멀리 스토리 브릿지가 그 물결을 가로지르며 빛났다. 그는 눈앞의 나무 벤치에 앉아 강물을 응시했다. 그간 쌓였던 모든 답답함이 강물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은 것 같았지만, 두려움이 공존했다.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를 몰아세웠다. 그는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은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그저 바라만 보았을 뿐, 이해하려 한 적이 없었다. 이해라는 개념은 그에게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심지어 자신의 삶조차도 부정과 회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삶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녀석이 무슨..." 그가 중얼거렸다.
멍하니 브리즈번 강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부정하고 살아왔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표현해 보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무슨 감정이었을까? 물어볼 사람이 존재치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다시 그만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보아왔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그란 존재가 느꼈던 무언가.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점점 기울어지는 스스로를 느끼던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신의 손목을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둠 탓에 속이 보이지 않았지만, 중요치 않았다.
"나의 아버지이자 너의 할아버지께서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자 시계를 사주셨단다. 온전치 않은 몸을 이끌고 사 오신 게야." 거친 기침을 내뱉으며 몸을 휘청거리는 아버지의 말에 와이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동안, 그는 다리를 절며 시계점을 향하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는 듯했다. "손목에 시계를 감으며 말씀하셨지. 시간이란 건 영원치 않아. 각자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단다. 나에겐 아버지가 사주신 물건 중 가장 값진 것이었지. 비록 입학 선물로는 사주지 못했지만, 이 시계를 너에게 주마."
와이어트가 낡은 시계를 처음 손에 감은 순간이었다. 한참을 시계를 바라보던 와이어트를 보며 그의 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난 밖에 앉아 이 시계를 하염없이 만지작거렸었지. 초조함과 불안감을 견딜 수가 없었단다.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그토록 간절했던 것은 처음이야. 모든 걸 다 내놓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겠니?"
아버지의 말에 와이어트는 고개를 저었다. "네 울음소리가 문밖으로 들려오는 순간, 나는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을 경험했단다. 느꼈던 모든 불안은 앞으로의 나날이 선사해 줄 설렘으로 뒤바뀌었지. 답답하고 어둡게 느껴졌던 기다란 복도가 이렇게나 환하고 넓은 곳이었다니! 내가 외쳤던 말이었어." 기침 소리가 그의 말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옆에 놓인 잔을 들어 물을 들이켰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손아귀가 느슨해져 떨어진 물 잔이 그의 발을 찍었지만, 아버지는 어떤 신음도 내지 않았다. 단지, 그는 목을 손으로 감싸고 전해야 할 이야기를 위해 간신히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내가 이 시계를 차고 다니며 얻은 깨달음을 전해주고 싶구나. 시계가 아닌 시간을 조심히 간직하렴.”
브리즈번 강 수면에 반사된 별빛이 그 자신이 답이라는 듯이 반짝였다. 렉시의 모습이 다시 떠오른 그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어떻게든 그녀를 털어내려는 듯, 와이어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모든 감정이 문제라면, 자신이 앞으로 떠날 그곳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제야, 와이어트는 홀가분하게 바지 밑단을 털며 일어날 수 있었다. 뒤돌아서 왔던 방향을 걸어가던 와이어트가 갑자기 멈춰 섰다. 문득, 이 강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핸드폰으로 강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브리즈번 강은 모레턴 만과 이어져 있었고, 어쩌면 태평양까지 흘러들어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는 빗방울들이 이리저리 튀자, 곧이어 나뭇잎들이 서로를 문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해진 브리즈번의 어둠만이 그의 눈앞에 남아있었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우린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어쩌면, 불확실한 그의 삶 역시 운명처럼 더 큰 바다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다음 날, 와이어트는 아직 풀지 않은 가방을 어깨에 들쳐 매고 문밖을 나섰다. 곧이어 택시 한 대가 그 앞에서 멈춰 섰다. “어디 가시나요?” 와이어트가 말했다. “공항으로 가주세요.”
공항으로 달리는 택시 안에서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문득, 그는 자신의 시계 속의 시간이 택시에 달린 시계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그 어디의 시간과도 맞지 않았다.
“잠시만요, 여기 잠깐만 세워주세요.” 와이어트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의 눈앞에 시계점이 보였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떤 것을 찾으시나요, 손님?" 주인이 인자한 미소로 그를 안내했다. 그는 곧장 진열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시계가 그 속에 놓여 있었다. '어떤 시계를 사야 할까?'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결정이 쉽지 않으신가 보군요. 그럴 때는 어떤 목적으로 사는지 고민해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주인이 웃으며 그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제 시계는 다이버 워치입니다. 주말마다 스쿠버다이빙을 즐겨하거든요.”
와이어트는 잠시 고민했다. 목적, 파푸아에 가는 목적이 뭐지? 그의 눈앞에 파푸아가 피어내는 뜨거운 불꽃이 일렁거렸다. 그는 주저 않고 외쳤다. “불에 녹지 않는 시계를 원합니다.”
시계점 주인은 손을 뻗어 유리 진열대 속 시계 하나를 그에게 꺼내주었다. “금시계죠. 웬만한 온도로는 절대 녹지 않는답니다.” 와이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의 시계와 똑같이 시간을 조율해 드릴까요?” 주인이 손으로 와이어트의 손목을 가리켰다. “손님이 어떤 시계를 차고 왔는지를 보는 게 제 직업병이랍니다.”
와이어트가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금으로 된 스트랩이 그의 팔목에 고정되었다. 밋밋해 보이지만, 단단한 느낌을 주는 시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