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푸아의 경계자들
와이어트는 일주일간의 휴식을 온전히 렉시와의 시간에 할애하기로 결정했다.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얽매던 의무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닐스에게 거짓을 고하고 숙소를 나서는 발걸음은 미세한 죄책감을 남겼지만, 오토바이 시동을 거는 렉시의 당당한 뒷모습을 본 순간 그 불편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는 더 이상 관찰자로 머물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를 이토록 변화시키는 자신의 일을 보여줄 수 있는 곳, 와이어트가 택한 곳은 아르팍 산이었다. 그녀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그가 자연스럽게 올라탔다. 곧이어, 오토바이는 갈색의 흙길 위를 질주하자 거친 바람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만은 유난히 청명하게 들려왔다.
"무슨 좋은 일 있나요?"
"예? 아… 너무 티가 났나요?"
"조금은요. 저도 알려주세요, 무슨 일인지."
한참을 뜸을 들이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이마스를 만나기로 했거든요!"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되살아난 활기가 가득했다.
"이마스요?"
"예! 집 앞에 편지가 와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녀는 조심스러운 듯 말꼬리를 흐렸다.
"정말 잘 됐네요…"
와이어트의 머릿속에 파편적인 이미지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를 죽이고 달아난 아이. 액자 속 그 시큰둥한 표정. 커다란 나무가 담긴 사진을 응시하던 렉시의 깊은 눈빛.
익숙한 흙길 옆에는 여전히 수많은 인부들이 굉음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끝없이 늘어선 트럭들을 지나 갈림길에 다다랐을 때, 와이어트는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불쑥 찾아온 이방인 남녀를 주민들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문득 두려워졌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성급한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후회가 짙은 그림자처럼 드리웠다.
그때, 귓가에 이질적이면서도 흥겨운 선율이 스며들었다. 오토바이가 멈추자, 묵직하고 선명한 북소리가 땅을 울리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 진동은 와이어트의 발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곳을 향해 걸어가면서, 렉시가 그를 향해 물었다. "원래 이렇게 혼자 다니세요?"
와이어트는 순간, 닐스의 서늘한 경고를 떠올렸다. '관찰자로 남아라'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지만, 그는 그를 덮치려는 불안을 단호히 외면했다.
"아뇨… 원래는 기자분과 함께 다닙니다. 오늘은 바쁘다고 하셔서요." 어설프게 지어낸 거짓말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이미 '관찰자'의 경계를 스스로 허물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낯선 외지인의 등장에 몇몇 주민들의 시선이 와이어트에게 향했으나, 아욕을 포함한 이들이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와이어트는 쭈뼛거리며 아욕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요."
아욕은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들을 반겼다. "전혀요! 오늘 오신 걸 보니, 정말 신이 정해준 운명이란 게 이런 건가 싶습니다. 마침, 축제를 벌이던 참이었거든요!”
주변을 둘러보던 와이어트의 시선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눕혀져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것을 받침대 삼아 그 아래에서 불이 지펴지고 있었다. 몇몇 여성들이 음식 재료들을 나무 홈 사이로 밀어 넣었고, 반듯하게 잘린 틈새로 잘게 썬 재료들이 붉은 열기를 띠며 뒤섞였다.
무리 곳곳에서 '쉿!'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한 나무집에서 여러 사람이 줄지어 나왔고, 그들은 호위하듯 화려한 장신구로 온몸을 치장한 한 여성을 둘러싸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를 뒤따르는 이들은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커다란 도자기와 활을 좌우로 흔들며 행진했다. 다시 음악이 울려 퍼지자, 와이어트 주변은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로 가득 찼다.
"결혼식인가 봐요?" 렉시가 와이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와이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신랑과 신부로 보이는 남녀가 나란히 섰을 때, 앞에 선 중년 남성이 담배를 꺼내 신랑에게 건넸다. 신랑이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담배를 입에 물자 불이 붙여졌다. 그리고 신랑이 들이마신 담배를 신부가 이어받아 입에 물었다. 중년 남성이 군중을 향해 힘차게 무언가를 외치자, 혼수품들이 서로에게 전달되었고 음악 소리가 다시 폭발했다. 백 명 가까운 인파가 공터로 몰려들어 흥겹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리 와서 한번 춤을 춰보시겠어요?"
아욕의 손짓에 렉시가 먼저 움직였다. 들뜬 흥분감이 그녀의 뒷모습 전체를 감쌌다.
"캉캉이랑 비슷한데요?" 렉시가 한 발씩 앞으로 내딛으며 깔깔 웃었다.
일렬로 선 주민들 뒤에서 와이어트도 어설픈 몸짓으로 춤을 따라 했다. 요란하게 울리던 북소리가 잠잠해졌을 때, 그의 셔츠는 이미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눈앞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모습에 그 역시 윗옷을 벗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잔잔한 음악이 뒤따르자, 와이어트는 렉시의 리듬에 맞추려 어설프게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마주 선 와이어트를 바라보며 입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부드럽게 좌우로 흔들리는 그녀의 고개, 와이어트의 두 팔을 붙잡은 그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이 그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무엇을 사랑하냐고 물었었죠?"
"예."
"불쌍하고, 챙겨주고 싶고, 함께 슬퍼하고 기뻐해주는… 그런 게 사랑인 줄로만 알았어요. 사랑이란 건 제게 그런 거였어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보고 싶고, 사소한 것들에 불안해하고, 보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걸 지금에야 알았어요! 고백할게요. 전 와이어트 씨 생각만큼 좋은 여자가 아닐 수도 있어요. 이중적인 여자죠. 늦은 밤 재즈를 부르면서도, 머릿속으론 록밴드들을 떠올려요. 너바나, 레드 제플린. 웃기죠?"
와이어트는 그녀의 고백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전혀요. 저도 모순적인 사람인 걸요. 누군가에게는 제가 공부한 것들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원서 넣기 전날에야 친구의 말에 충동적으로 고른 학과였어요. 지루하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죠. 언어를 배우는 일을 제 길이 아니라며 또다시 떠나려 했죠. 우연히 한 교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요. 그때부터 하나씩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이유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어쩌면, 저는 제가 만든 이유들 사이에서 사랑을 찾는 건지도 몰라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붉게 물든 노을이 담긴 듯했다. 축제가 마무리되고 여러 음식이 차려지자, 그들은 대접받은 음식을 맛본 뒤 잠시 밖으로 나와 산책하기로 했다. 같이 곁들인 술 몇 잔에 기분 좋을 정도의 취기가 감돌고 있었다. 자갈길을 걸어 작은 언덕 중턱에 걸터앉아 마을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마주 앉은 둘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아름다운 곳이에요.” 렉시가 무릎을 가슴에 껴안으며 말했다. “후회하지 않으시죠?”
“어떤 걸요?” 마을을 바라보던 와이어트가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 세상에 발을 들인 것을요. 같이 숨 쉬고, 춤추고, 마시는 이 모든 것에 대해요.”
“아직은요.”
“이건 어때요? 당신은 막 세탁한 이불을 좋아하고 잭콕 한 모금에 얼굴이 붉어지는 남자이면서…”
“그게 뭐죠?”
“제가 당신을 연구하는 거예요! 당신이 살아가는 세상 속으로 들어간 거죠. 어때요? 저는 당신과 함께 걷고 있는데, 제가 바라보는 당신의 모습이 다른가요?”
“전혀요.”
그들이 앉아있는 풀밭 위로 무수한 별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중이었다.
마을을 둘러싼 울타리를 따라 난 길을 걸으면서도, 와이어트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그때,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던 한 귀퉁이에서 전통 복장을 한 아이들이 보였다. 렉시는 허리를 숙여 총총걸음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한 아이가 나무 막대기로 렉시를 향해 겨누며 외쳤다. "저리 가!"
와이어트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전에 공을 차고 가장 먼저 달려 나갔던 바로 그 아이였다.
"얘야, 손에 든 것이 무엇이니?" 렉시는 당황한 기색 없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창이요! 저는 멜라네시아인이니까요!" 아이가 신이 난 목소리로 답했다. "아버지가 우리의 문화가 사라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하셨거든요!" 시위에서 보았던 동작을 흉내 내는 아이들의 어설픈 몸짓이 그들의 진심을 전달하는 듯했다.
"무기만으로 상대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란다."
렉시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아이들을 바라보며 가엾다는 듯이 속삭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와이어트의 마음속으로 한 가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이 여성, 지금 바로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타인에 공감을 하는, 렉시를 이해하고 싶었다.
*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창문 너머 해의 대부분이 산에 가려져 있었다. 도심 곳곳에서 불빛들이 밝게 켜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도시에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갑자기 그의 방이 컴컴해졌다. 스위치를 눌러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온전한 어둠이 방을 덮었고, 창밖 도시에서도 빛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옆방에서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닐스가 그 앞에 나타났다.
“종종 정전이 발생하곤 하지.” 그가 말했다.
“전력 문제인가요?”
“그럴 수도… 가끔은 정부가 의도적으로 전력을 차단하기도 해.”
“왜죠?”
“불을 끄는 거만큼 진정시키기 좋은 건 없거든.” 어둠 속 희미한 윤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동이 틀 무렵, 어둠이 서서히 도시에서 물러났다. 오래간만에 단잠에 든 듯, 와이어트의 깊은 코골이가 방을 울렸다.
똑똑.
똑똑.
새벽의 노크 소리. 꿈과 현실 사이에서 와이어트가 깨어났다. 몸을 뒤척이다 바라본 창밖 너머엔 가로등 불빛만이 고요히 번지고 있었다. 실눈을 뜬 듯 희뿌연 연기가 밖을 뒤덮은 날이었다.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누구시죠”. 메마른 목소리로 그가 겨우 말했다.
“야루예요!” 다급한 목소리가 문틈을 파고들었다. 차가운 밤처럼 날이 선 침묵 후 그는 천천히 문고리로 손을 움직였다. 문 앞엔 온몸이 땀에 젖은 야루가 서 있었다. 거친 호흡으로, 그의 가슴이 앞뒤로 요동쳤다.
그는 허리를 숙이며, 연달아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얼굴이 땀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눈 주변으로 기다란 땀이 흘러내렸다.
“렉시가 죽었어요.”
그의 말이 고요한 새벽의 공기를 갈랐다. 슬프게도.
그녀의 시체는 교회 근처 한 길목에서 발견됐다. 가슴과 복부에 각각 총알 한 발씩. 삶의 미련 혹은 다른 무언가, 그녀의 옷과 팔목에는 그것들이 남긴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와이어트는 보지 않았다,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