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푸아의 경계자들
아르팍 산에서 돌아온 그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침대 위에서 눈을 뜨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지난 며칠 간의 일들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삶과 관계를 둘러싼 여러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것만 같았다. 그의 의식은 자신이 어느 지점을 향해 표류하고 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그의 손은 옆에 놓인 노트를 위로 들고 펼쳤다. 빽빽한 검은 글자들이 어지럽게 느껴졌다. 한 장 한 장을 읽어 내려가던 그는 돌연 노트를 덮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몇 통의 부재중 전화 기록이 쌓여 있었다.
그녀에게 마지막을 말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그는 직감했다. 더 이상 미루는 것은 고통만 줄 뿐이었고, 그는 마침표를 찍는 순간만큼은 그녀의 눈을 보며 말하고 싶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낮은 신호음을 냈고, 렉시와 와이어트의 목소리가 단호하면서도 미묘하게 겹쳐 흘러나왔다.
이튿날, 닐스의 묵인 아래 와이어트는 라마 호텔을 나섰다. 택시 뒷좌석에 기대앉은 그는 전날 닐스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렉시가 머무는 집은, 한눈에 봐도 흔한 파푸아 주택 다른 느낌을 주었다. 입구를 지나면 낮은 포치 너머로 각진 지붕과 시간에 바랜 듯한 파스텔톤 외벽이 먼저 시선을 끌었다. 울창하게 솟은 야자수와 무성한 수풀들이 집을 에워싸며, 마치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격리된 경계선을 긋는 듯했다. 과장된 장식물은 없지만, 햇살에 조금씩 빛이 바랜 옅은 붉은색과 은빛이 감도는 외관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와이어트는 문 앞에서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잠시 후, 얇은 원피스 차림의 렉시가 문을 열었다. 좁은 거실에는 작은 냉장고와 원목 탁자만이 놓여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다 타버린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벽에 기대선 한 남자가 와이어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긴 머리, 짙게 그려진 아이라인, 그리고 앙상한 몸. 헐렁한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의미 불명의 문신들이 그의 존재감을 압도했다. 날카로운 턱선과 매서운 눈빛은 와이어트의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했다. 렉시와 남자는 마치 서로가 그곳에 없는 존재인 양, 스치듯 서로를 외면했다.
"오빠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렉시가 와이어트에게 속삭였다.
렉시의 방은 와이어트가 알지 못하는 밴드들의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었다. 포스터 속 모든 인물들은 하나같이 세상을 향해 격렬한 절규를 토해내는 듯했다. 구석의 작은 원목 탁상 위에는 낡은 십자가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낯익은 얼굴들과 함께 찍힌 렉시의 사진들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 와이어트는 액자들을 하나씩 들어 살펴보다가, 문득 한 사진 앞에서 멈췄다. 그 사진은 유일하게 렉시의 모습이 담겨 있지 않은 풍경 사진이었다.
렉시가 울리는 휴대전화를 붙잡고 황급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리더니 그 남자가 들어와 와이어트에게 다가왔다. 와이어트는 황급히 액자를 내려놓았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공허한 눈빛을 지닌 남자는 말없이 와이어트를 응시했다. 군데군데 흉터가 난 피부 사이로, 양 옆으로 찢어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렉시와 자고 싶은 거지?”
와이어트는 그를 바라보며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공허한 사내의 눈이 그의 모든 것을 샅샅이 뒤지는 듯 느껴졌다. 이 앙상한 사내가 주는 압도감은 와이어트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와이어트는 어설픈 몸짓으로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그 사내의 옅은 눈썹 옆에 매달린 피어싱만이 아주 약간 흔들렸다. 한참을 말없이 노려보던 그 사내는 문 밖으로부터 발소리가 들리자 자리를 떠났다. 마치 그가 애초부터 이곳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혹시 오빠가 무슨 말을 했어요?”, 렉시가 황급히 방문을 열면서 들어왔다. 또 한 번 와이어트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바빴나 봐요?” 렉시가 허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달콤한 과일향이 아찔하게 그를 덮쳤다.
그는 다시 한번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 그러나 또다시 그녀는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와이어트는 허리에 감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달라진 기류를 간파한 듯, 렉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뒤편의 침대로 물러섰다.
곧이어, 렉시는 침대에 엎드려 누워 관능적인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낡은 나무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나한테 그렇게 다가왔으면서, 이제 두렵나요?”, 그녀가 속삭였다. 와이어트는 그녀가 내뱉는 옅은 숨결마저 두렵게 느껴졌다.
“여기서 저를 겁탈하고 떠난다 해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 자리에 누워 껴안아준다면 저는 당신을 더 사랑하겠죠.” 그녀의 눈썹이 조금씩 움직였다. 짙게 칠한 립스틱 밖으로 새 나오는 그녀의 언어가 와이어트의 마음을 겨냥했다.
와이어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묻고 있었다. 과연 나는 그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또다시 그녀의 미혹이 그와의 경계를 흐릿하게 했다. 몇 걸음. 단 몇 걸음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에 달려가 품에 안길 수 있었다. 단순한 마음의 변화였더라고, 아니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었더라고 속삭이며 키스를 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의 호흡으로 가득 찬 방 안은 후덥지근한 열기로 와이어트를 짓눌렀다. 등을 가로지르는 땀줄기 마저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와이어트에게 주머니 속으로날 선 종이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편지. 자신의 감정을 베네딕트 교수에게 담담히 전했던 글들이 적힌 편지였다. 브리즈번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몸에 소중히 간직했던, 자신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자신의 의지이기도 했다. 그는 간절하게 떠올리려 노력했다. 자신의 목적을, 자신의 역할을, 원칙과 신념을. 지켜봐야 한다!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외침은 이 공간 안에서는 무의미한 메아리로 변질되는 듯 보였다.
어느새, 와이어트는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침대로 몸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그녀의 옆에 누워 살결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경계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와이어트의 눈빛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내맡겼다.
창가로부터 비치던 햇빛이 사라지고, 점차 서늘한 밤공기가 와이어트의 피부를 감쌀 때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한 겹의 이불을 끌어올린 채 렉시가 그를 껴안고 있었다.
“음…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와이어트의 시선이 방 한 구석의 책상으로 향했다.
“어떤 거요?”
“다른 건 렉시 씨가 있는데, 저 사진만은 유일하게 조금 다른 것 같아서요.”
그녀의 시선이 그 액자에 멈췄다. 그녀의 몸이 움츠러드는 것이 와이어트에게 느껴졌다.
“교회가 불이 났을 때, 마을 사람들이 기도를 드렸던 나무예요.”
“렉시 씨도 저곳을 좋아했나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저는 그때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했어요. 다시 파푸아에 돌아왔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른 교회를 찾아 떠난 후였죠." 그녀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면… 저 사진은요?”
“그럼에도, 그곳에서 끝까지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와이어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대신 답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액자 속 시큰둥한 표정의 한 아이에 그녀의 마음이 묻어 있었다.
렉시는 고개를 돌려, 와이어트를 또렷이 응시했다.
“당신과 아이들은 참 닮아있어요.”
그 말에 그녀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놀란 듯 숨을 삼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예?”
“무던한 사람이에요.” 렉시가 낮고 단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와이어트의 시선이 미묘하게 흔들리며, 어깨가 풀린 듯 긴장이 풀렸다.
“무슨 뜻이죠?”
그녀는 고개를 살짝 떨구고,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이따금 떠오르는 가느다란 빛줄기 아래에서 눈을 들어 다시 말했다.
“기쁠 때 웃지를 않고, 상처를 받아도 아파하지 않아요. 슬퍼도 울지 않죠.”
와이어트는 가만히 숨을 고르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창밖의 먼지처럼 흩어지는 감정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듯, 눈가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가 그런가요?”
“남들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어서겠죠…”
그 말에 와이어트는 입술을 떨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이불 위에 놓인 그의 손목에 향했다. “잠시 시계 좀 봐도 될까요?”
와이어트는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그녀에게 건넸다.
“많이 해졌네요. 스친 자국들도 가득하고.” 그녀가 그의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아까 두려웠어요. 이대로 영영 떠나버리면 어떡하지 해서요.”
“아깐…” 와이어트는 하던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렉시는 다시 그에게 시계를 돌려주었다. 잠시 둘 간의 침묵이 오갔다. 렉시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활기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와이어트씨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저도 알고 싶어요. 다음에 저도 같이 따라가도 괜찮을까요?”
와이어트는 말없이 그의 품에 간직하고 있던 편지를 꺼냈다. 그 편지를 읽으며 렉시는 몇 번이고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네요, 누군가의 삶을 관측한다는 것은요.”
“그래서 고민했어요.”
“무엇을요?”
“제가 처한 상황과 학문적 가르침 간의 괴리감을요.”
“우스운 것 같아요. 알려고는 하는데 직접 들어가는 건 안 되는 것이요. 당신이 저와 함께 있으면서 새롭게 느껴지는 것도 있잖아요. 이건 어때요? 감정 같은 것도 논문에 넣는 거예요!”
“감정적 요소요? 그런 건 쓸 수 없어요. 증명될 수도 없고, 각자마다 다른 이유로 움직이잖아요. 적어도, 베네딕트 교수님께선 절대로 받아들이시지 않을 거예요.”
“정말로 그런 것들로 우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논리, 이성, 원칙들로요.”
와이어트는 폭소를 터뜨리고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둘 간의 침묵이 다시 곁으로 찾아왔다.
“사랑보다 강력한 감정도 있을까요?”
렉시의 목소리가 어둠을 비집었다. 와이어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천천히 감았다.
“… 좋아하는 마음?”
그는 한참 동안 천정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렉시는 고개를 젓더니, 이불자락을 슬며시 쥐었다.
“좋아하는 건 가볍잖아요. 사랑은 다르죠.”
렉시는 시선을 발끝으로 내렸다. 방엔 한동안 말 없는 공기가 감돌았다.
“그럼 좋아하는 감정은 좀 더 폭넓은 거겠죠. 사랑하지 않는 것들도 좋아할 수 있으니까요.” 와이어트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저를 좋아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가요?”
렉시는 와이어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사랑하는 거죠. 더 깊으니까.”, 와이어트가 바로 대답했다.
“사랑하는 건 저라고 치고, 좋아하는 건 뭐가 있는데요?”
그의 말에 렉시는 시선을 살짝 떨구고 물었다. 와이어트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말해주세요.”
“발렌티노스.”
“발렌티노스?”
그녀가 궁금한 표정을 짓자, 와이어트가 설명했다.
“10달러짜리 뷔페 같은 식당이에요. 금요일이면 일찍 퇴근한 아버지와 배불리 먹곤 했죠.”
“좋았겠네요.”
“맞아요, 음식도 맛있었어요.”, 와이어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했던 좋은 기억 때문이죠.”
렉시는 고개를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와이어트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렉시의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또, 또 뭐가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막 세탁한 이불, 자기 전에 마시는 맥주 한 모금, 럭비 경기 보는 거.”, 그가 잠시 생각하며 말했다.
“많이도 있네요… 그런데 그런 것들 모두 사랑하진 않는 거예요?”
“힘들지 않을까요. 당신에게 느끼는 감정을 다른 것들에도 느끼는 게…” , 와이어트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생각만 해도 괴로운 기분이 들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그걸 표현할 단어가 없는 걸까요?” 렉시가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말하고 싶은 거 있어요?”, 와이어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와이어트는 슬며시 눈길을 들어 그녀의 어깨너머로 천천히 내리는 먼지를 응시했다.
“렉시 씨는요?”
“음… 오빠?”
“그리고요?”
“글쎄요.”
“아이들은 사랑하진 않는 건가요?”
그녀가 입가가 옅게 올라갔다. “아뇨, 정말로 사랑한답니다.”
와이어트가 몸을 움직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얀 솜털 같은 먼지가 천천히 떨어지는 시간만큼 기다렸다. 그 묵직한 정적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는 부드럽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