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십자가

파푸아의 경계자들

by 김승민

마노콰리 교회의 붉은 기와지붕이 새벽의 옅은 분홍빛 여명을 받아, 와이어트의 시선에선 마치 피로 물든 얼룩처럼 번져 보였다. 웅장한 십자가는 그의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로 다가왔고, 단아한 자태를 뽐내던 종탑은 마치 그를 내려다보며 침묵을 강요하는 듯했다. 이층 현관으로 이어진 계단 양옆에는 현지어로 새겨진 표지판이 붙어 있었고, 꽃장식은 덧없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서자, 밝은 목재와 흰색 페인트가 어우러진 간결한 설계가 눈에 들어왔다. 회중석 사이에 늘어선 견목 좌석들은 단정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아침 빛살을 받은 스테인드글라스 성화들이 와이어트의 굳은 눈가를 스쳤다. 제단 앞에는 부드러운 흰 장막이 천처럼 흘러내렸고, 그 앞은 전통 문양이 새겨진 천 위로 미소를 짓고 있는 렉시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렉시가 누워 있었다. 와이어트의 눈이 그녀의 얼굴에 닿자마자, 그의 시야는 순간 뿌옇게 흐려졌다. 잔잔한 바람결 속 나뭇가지처럼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차가운 뺨을 감싸자, 손끝에 느껴지는 싸늘한 감촉은 그의 기억 속 따뜻한 온기와 격렬하게 충돌하며 그의 오감을 마비시켰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이미 그의 영혼은 바닥으로 가라앉아 무감각해진 상태였다.

10시 정각이 되자, 수백 명의 인파가 검은 전통 의상을 입고 모여들었다. 맨 뒷줄에서 와이어트는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향을 밝히는 모습을 보았다. 저 멀리 제단 쪽에서 파푸아 전통 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마마” 불렀고, 고해의 노래가 공간을 메웠다.

맨 뒷줄에 선 와이어트는 차갑게 불어오는 해풍 속에서도 이 장면을 뚜렷이 바라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남성이 목소리를 다듬자 적막이 흘렀다. 그의 깊게 파인 주름과 회색 머리는 이 땅의 고통을 오랫동안 지켜온 증인처럼 보였다.

"오늘 이 자리에 마을의 모든 가족이 모였습니다." 목사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당신의 영혼이 산과 강, 조상들 곁에 안식하기를.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자연, 그리고 조상의 품 안에서 하나입니다."

"아멘." 와이어트의 주변으로부터 중얼거리는 기도문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마치 바다 위를 스치는 바람처럼 교회 안을 감돌았다. 목사는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마치 각각의 단어를 소중히 다루듯 입을 열었다.

"우리가 잊지 않는 수많은 친구와 가족들 곁으로, 우리는 또다시 채 여물지 않은 또 다른 생명을 보내주었습니다. 하지만 형제자매 여러분, 렉시는 단순히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와이어트의 바로 옆에 앉은 한 여성이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아멘." 작게 외쳤다.

"오늘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부릅니다." 목사의 음성이 한층 더 깊어졌다. "렉시는 이 슬픈 땅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의 구원자가 되어주었습니다. 핍박과 가난 그리고 멸시에 지친 우리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는 잠시 멈춰 제단 위의 렉시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멀리서 왔습니다. 우리와 다른 피부색을, 다른 언어를 가진 채로.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우리보다 더 뜨겁게 이 땅을 사랑했습니다. 정부의 탄압 앞에서도, 무력 충돌의 공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저는 확신했습니다. 신께서 우리의 기도에 답을 주셨음을."


교회 안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노인이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떨구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얼굴에 핏줄이 드러난 채로 슬픔을 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증오보다 오래 남는다'라고.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고, 상처받은 이들의 손을 잡으며, 그녀는 몸소 그 말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목사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님, 렉시는 당신의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녀는 슬퍼하는 우리를 위로했고, 이제 당신의 품에서 영원한 위로를 받고 있을 것입니다."
바람이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와 촛불을 흔들었다. 마치 렉시의 영혼이 그들과 함께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우리의 친구이자, 가족, 그리고 신께서 내려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비록 그녀의 육신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녀가 심어준 사랑의 씨앗은 이 땅에서 계속 자라날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서 말입니다." 목사는 마지막으로 렉시의 사진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렉시, 고맙습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어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서, 포기하지 말라고 일깨워 주어서. 당신의 영혼이 평안하기를, 그리고 언젠가 우리 모두 당신과 재회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 교회 안 모든 이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울려 퍼졌다.

와이어트는 고개를 올려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십자가는 붉게 칠해져 있었다. 그대로, 그는 천천히 교회를 빠져나왔다. 바다를 뒤에 둔 채로,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갔다.

술병이 그의 방 안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와이어트는 마치 쓰러진 듯 누워 있었다. 허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그는 눈을 감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날카롭고 처절했으며, 온몸을 격렬히 진동시켰다. 그는 허공에 대고 울부짖으며 맨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렉시의 죽음이 아닌, 그의 삶을 덮쳤던 모든 절망과 무력감에 대한 분노였다. 그에게 몰려온 감정은 공허나 허무 같은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거대한 중력에 짓눌려 산산조각 나는 고통과도 같았다.

닐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의 앞에서 와이어트는 온몸을 다해 저항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듯, 책상 위의 노트를 쥐고는 한 장 한 장 찢기 시작했다. 찢긴 조각들이 그의 몸 주변으로, 그가 렉시의 죽음과 함께 다시 떠올린 모든 고통의 조각들처럼 흩어졌다.


“이 모든 걸... 그만하겠습니다.” 그는 찢긴 종이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치가 죄인이 신부에 고해성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닐스는 호흡을 연달아 몰아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


그로부터 또 한참이 지나자, 닐스가 일어나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어깨가 축 처진 채로 서 있는 와이어트에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올려 닐스를 바라본 와이어트가 팔을 들어 그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그의 손이 와이어트에겐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리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며칠 동안, 그 둘은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형식적인 대화만 오갔을 뿐이다. 와이어트가 짐을 챙겨 공항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그는 먹먹함이 담긴 눈빛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티켓을 손에 든 와이어트는 가방을 질질 끌며 승무원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운이 좋은가요?” 그가 중얼거렸다.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뜬 승무원은 곧 대답했다. “저희 항공을 이용하시는 손님분들은 언제나 운이 좋으시죠.” 직업적인 태도가 그녀의 대답에 묻어 나왔다.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