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푸아의 경계자들
닐스가 다시 마노콰리의 라마호텔로 돌아온 것은 와이어트가 렉시와의 단잠을 보낸 다음 날이었다. 렉시가 자리를 뜬 후에도, 그녀의 향기에 빠져있던 와이어트에게 문밖으로 닐스가 소리쳤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고?” 문이 열리자 그가 반갑게 와이어트를 껴안았다.
방을 나선 그들은 숙소 앞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담배를 입에 문 닐스가 와이어트의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꽤나 익숙해졌나 보군!”
"예? 예… 이상하네요. 원래는 어지럽거나, 속이 안 좋아지는데 말이죠.”
“거 참 신기한 일이로군…”
평소답지 않게 닐스가 와이어트를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그동안의 일들을 묻던 와중, 한 차량이 정문을 지나쳐 서서히 다가왔다. 침묵이 찾아온 것은 노란색으로 경찰이라는 단어가 테이핑 된 차량에서 두 남성이 내릴 때쯤이었다. 와이어트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벌떡 일어서는 닐스가 보였다.
두 남성은 와이어트를 흘깃 쳐다본 뒤 닐스를 데려갔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한참을 대화하는 셋을 바라보는 와이어트는 알 수 있었다. 피 흘리던 야루의 옆에 누워있던 사내의 얼굴임을! 그의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혹시, 천으로 둘러싼 자신의 얼굴이 노출된 것이 아닐까? 자신의 이국적인 눈과 코가 그의 기억 속에 또렷이 자리 잡힌 것은? 불안한 상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헤집었다.
머리를 격하게 좌우로 흔들던 닐스가 와이어트에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 뒤로 두 사내가 닐스를 따라 그에게 다가왔다.
“혹시 손바닥으로 하관을 가려보시겠습니까?” 얼굴이 익숙한 남성이 와이어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와이어트는 최대한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천천히 자신의 얼굴로 손을 갖다 댔다.
“조금만 더 아래로요.” 다시 한번 남성이 요구했다.
와이어트의 손이 간신히 콧볼만 가릴 정도로 내려가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닐스가 버럭 소리쳤다.
“빌어먹을!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말게!”
두 경찰은 놀란 듯이 몸을 움찔하며 닐스를 쳐다봤다.
“그럴 리가 없네. 자네들이 말한 날엔 내가 와이어트 군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어! 내가 보증하네.” 닐스의 격양된 목소리는 여전했다.
거친 몸짓으로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닐스가 소리쳤다.
“돈이 필요한 건가? 자, 여기 가져가게! 생사람 잡지 말고. 만약, 자네들이 증거도 없이 미국인 학생을 잡았다는 것이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도 해보고!”
제복을 입은 두 남성은 잠시 서로에게 귓속말을 하더니, 이내 자신들이 타고 온 SUV를 끌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차량이 벗어나는 걸 끝까지 지켜보던 닐스가 와이어트를 꾸짖었다.
“제정신인가!” 닐스의 호통에 와이어트가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담배를 입에 문 닐스가 분을 삭이려는 듯이 연거푸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내 침착한 목소리로 그를 타일렀다. 그에게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말투와 어조였다.
“늙은이가 노파심에 하는 말이니 한 번만 들어주게. 자네보다 먼저 이 땅을 밟고, 같은 길을 걸었던 이로서 말하는 거기도 하네.”
“우리는 관찰자이라는 점, 그것을 잊으면 안 돼.” 닐스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딴 게 아니네. 자네가 명심해야 되는 점은 그들을 편향된 시선에서 바라보면 안 된다는 걸세.” 그의 입은 계속해서 연기를 토해냈다.
“파푸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사는 이들 모두가 자신의 삶과 가족들이 터전을 지어 살아가는 곳이야. 그들 각각의 삶과 이유들이 존재한다는 말일세. 우리는 한쪽에 치우쳐서 그들을 바라보면 그건 큰 실수라네.”
간간이 새어 나오는 한숨소리에 와이어트가 움찔댔다.
“그런 말 있지 않은가. 윙크를 하는 이가 있으면, 그 사회 속에서 윙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밝히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절대 윙크를 받은 이가 되어서 안된다는 말이야.”
닐스가 담뱃불을 끄기 위해 지져 밟으며 말했다.
소란 이후 침대에 누운 와이어트는 자신의 얼굴을 이불에 거칠게 비볐다. 불에 달아오른 듯 붉어진 그의 얼굴은 쉽사리 가라앉을 듯 보이지 않았다. 그를 향한 닐스의 논리에 어떠한 대꾸나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이는 단순한 실책의 인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타인의 신중한 성찰이 그의 섣부른 판단이 야기할 결과를 처참하게 예측했기에 느껴진, 부끄러움이었다.
지난 며칠간의 경험, 즉 시위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던 경솔한 행동, 야루와 무섭과의 교감, 그리고 재건 중인 교회의 잔상들이 끊임없이 그의 의식 속을 맴돌았다. 그는 자신의 행위와 사유가 객관적 탐구를 지향하는 학자의 궤도를 이탈하여,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음을 수긍해야만 했다. 베네딕트 교수의 엄격한 가르침을 따랐는가?, 가슴속에 새겨두었던 학문적 윤리를 배신하지 않았는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철저히 그들의 사회에 발을 걸치고 서 있었다. 그렇다면 경계는 어디인가? 발을 걸치고 서 있다면 경계정도는 알아차려야 하지 않겠는가, 늘 정갈하던 그의 머릿결이 거친 손길에 길을 잃은 듯 헝클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자신을 노려보았다. 지금 내가 밝히고자 하는 것을, 찾고자 하는 답을 스스로에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파푸아가 지닌 촛불의 심지를 명확한 언어와 철저한 논리로 스스로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이 따르는 혼합된 신앙체계, 고통과 울분에 저항하는 심리, 역사적 꼬리, 억압된 생활. 더 이상 뭘 말할 수 있지? 아니, 정말로 그들을 제대로 바라본 것이 맞는가.
눈을 감은 그에게 자꾸만 렉시가 떠올랐다.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그의 생각을 방해했다. 스스로를 거칠게 질책할 때마다 그는 렉시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바라보는 눈빛이 따사롭게 그를 어루만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보여준 감정은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녀가 자신의 아이들에 보여준 태도는? 한 단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문제인가. 또다시 그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것을 그는 또다시 마주해야만 했다. 그녀는 마치 늪과 같았다. 발길이 닿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는 거대한 늪과 같았다. 그녀를 본 순간부터 점차 그들의 사회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재생되었다. 그녀는 그를 착각 속에 빠뜨렸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마치 문제의 답을 해결할 수만 있다는 희망을 그에게 심어 주었다.
“벗어나야 돼!” 그는 소리쳤다. 무기력하게 그녀의 몸짓에, 향기에, 그리고 언어에 매혹되어 버리는 자신을 멈춰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