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푸아의 경계자들
땀으로 뒤범벅된 옷을 벗고, 샤워를 마친 와이어트는 침대에 걸쳐 앉아 창 밖을 바라봤다. 노을이 내려앉은 하늘은 세상을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심장이 끊임없이 두근거렸고, 그것은 분명 하늘 때문이 아니었다. 사색을 깨는 배기음 소리가 창문을 넘어오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딱 달라붙는 청바지에 갈색 재킷을 입은 렉시는 지긋한 눈빛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토바이에 와이어트가 올라타자 그녀는 능숙하게 시동을 걸었다. 온몸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고요한 도로 위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한적한 도로길을 지나자, 그녀의 오토바이는 언덕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한 좁은 길목, 드문드문 자리를 빛내는 전등, 뿌옇게 올라온 흰 먼지들. 그 모든 것들을 지나쳐 언덕 위에 위치한 건물 앞에서야, 그녀는 쓰고 있던 헬멧을 벗었다. 그제서야 상쾌한 복숭아 향이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건물을 들어가자, 와이어트는 잠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둠 속에서, 화려한 네온들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와이어트는 렉시의 표정을 살폈지만, 어둠 덕에 그녀의 윤곽만이 보일 뿐이었다. 창가 근처의 테이블로 턱시도를 입은 남성이 그들을 안내했다. 한쪽 벽에 세워진 통유리로 마노콰리의 모습이 펼쳐졌다. 짙은 어둠은 바다와 도시의 경계를 지워버린 듯했고, 드문드문 보이는 빛들은 별빛이 반사된 밤바다의 수면 위를 떠올리게 했다.
“무엇을 마시겠습니까?” 웨이터가 격식 있는 어투로 그들에 물었다.
“화이트 러시안.” 그녀의 부드러운 시선이 와이어트에 향했다.
“저는 잭콕 한 잔 주세요.”
그녀는 천천히 신음을 뱉으며 창문 너머의 풍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죽재킷이 테이블의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주에서 오셨다고 들었어요. 이곳은 좀 어떠신 것 같나요?”
고혹적인 그녀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 칵테일 바를 수놓는 네온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빛났다.
“이곳이요? 좋은 곳 같아요. 예상했던 것보다.”
“궁금했어요. 굳이 이곳에 오실 필요는 없으신 분 같아서요.”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거죠?”
“상처를 머금은 곳이니까요.” 그녀의 말과 함께 웨이터가 그들이 주문한 칵테일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와이어트가 각진 유리잔을 들어 잭콜을 입에 머금었다.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자 레몬조각이 떠다니며 기포가 하나씩 터졌다.
“렉시 씨는 어디에서 오셨나요?”
“너무 많은 곳을 떠다녀서 쉽게 고를 수가 없네요.” 그녀가 티슈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그러면, 왜 이곳에 온 거죠?”
생각에 잠긴 듯이 한참을 입술을 문지르던 그녀가 말했다. “처음은 선교활동이었어요.”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는 듯, 그녀의 입이 미세하게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묻혀 금세 지워졌다. 여러 색의 조명이 비추는 무대 위에 정장을 입은 남성 셋이 각각 자신의 악기를 품에 얹고 연주했다. 색소폰을 입에 문 남성은 자신의 흥에 취한 듯 다리를 꼰 채로 몸을 열심히 흔들었다. 그들 앞에, 노래를 부르던 한 남성이 마이크를 잡고 자신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자카르타와 호주를 거쳐 이곳에 오게 되어 행복하다며, 과장된 몸짓을 선보였다.
“오랜만이네요, 듣는 거는.”
렉시가 술잔을 입에 홀짝이며 말했다.
와이어트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무대 위에서 다른 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조명에 반쯤 보이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와이어트는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계속되던 음악소리가 멈춘 것은 30분쯤 흐른 뒤였다. 그들이 잠시 바람을 쐬러 무대를 떠나고 나서야, 와이어는 그녀의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그리고 말없이 반쯤 빈 유리잔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는 이들의 영어가 좋아요. 뚝뚝 끊기지만 진심을 전하는 것 같잖아요.”
담배 연기에 연한 알코올 향이 스며 날아왔다.
유리잔을 들었다 다시 내려놓은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땐, 기억 속 무언가를 더듬으며 꺼내는 듯했다. 다시 그녀 앞에 놓인 칵테일을 마신 뒤, 음미하듯 이야기를 꺼냈다.
“몰려오는 고함소리와 둔탁한 파열음 사이에서 본 한 아이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어요. 뜨거운 불길이 매캐한 연기와 함께 다가오는 것을 본 순간에… 결심했죠. 폭력과 갈등에 휘말려 지쳐버린 이들을 사랑하기로.”
“그게 그 아이인가요? 이마스라는…”
“나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그 아이를 보며 생각했어요. 소리를 내며 우는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 너희가 가여웠죠. 재로 인해 검게 그을린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마치 저에게 묻고 있는 듯했죠. 무심코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마치, 혼자만의 공간에서 추억이 담긴 사진 한 장 한 장을 꺼내 보는 것만 같았다.
“뭐라 대답했는데요?”
그녀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나는 너의 마마야...”
어느새 그녀의 눈가에는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와이어트는 더 이상의 호기심은 그녀를 아프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저는 알고 싶었어요. 왜 파푸아의 독립투쟁을 향한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을까?”
“다른 곳은 그렇지 않나요?” 그녀가 팔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와이어트는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느꼈다.
“글쎄요… 대부분 그렇죠.”
“왜죠? 제 말은… 왜 파푸아의 독립투쟁이 끊이질 않는 것에 관심을 가지신 거죠?”
와이어트는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조금씩 꼬여 들어갔다. 왜지?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베네딕트 교수의 강의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의 말을 듣고 내가 공감한 이유는 뭐지? 흔들리는 눈동자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당신도 상처가 존재하군요. 어서 말해주세요, 당신의 아픈 기억을.
와이어트는 그녀 앞에서 자신이 잊고 싶었던 기억을 털어놓았다. 숨기고 싶었던 고통과 치욕 역시 드러냈다.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마치 진한 향수처럼 그녀의 체취가 강한 알코올과 함께 남은 듯했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그 앞에 몇 개의 잔들이 비워진 뒤였다. 그들은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재킷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바라보던 와이어트는 자신이 머무는 숙소가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그는 그녀와의 하루를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녀 역시 같은 감정이길 바라면서, 그는 최대한 젊잖게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방 안에 들어가서 한 잔 더 하실래요?”
뻣뻣한 자세로 서 있는 그를 바라보며 그녀가 웃으며 끄덕였다.
몇 잔의 술이 더 들어가자, 와이어트는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서서히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뒤에 놓인 창문을 열며 그는 담배를 꺼냈다.
“담배 피우실래요? 종종 피우시는 것 같아서요.”
와이어트가 건넨 담배를 받아 든 렉시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좋은 밤이네요, 그렇죠?” 와이어트가 연기 사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담배가 연기를 뿜지 않자, 렉시는 비틀거리며 와이어트의 손을 잡고 침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새 그의 위에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와이어트의 얼굴을 스치자, 그의 눈동자가 분주히 움직였다. 이불에 걷어 차인 술병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까 물으셨죠, 어디서 왔냐고요?” 렉시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 “저는 오호츠크해가 보이는 항구마을에서 왔어요.” 그녀가 와이어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생각보다 더 끔찍한 곳이었어요.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저를 학대했거든요. 나이 든 남자들에게 헐값에 팔았죠. 매일 밤 그들에게서 나쁜 것들을 배웠어요. 어느새 능숙해졌고, 제 행동에 죄책감을 느낄 때는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난 후였죠. 역시 저와 같이 아버지에게 매일같이 맞던 오빠와 함께 러시아를 떠난 것도 그 때쯤이고...”
“어때요? 제 이야기.”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담담해 보였다.
와이어트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자,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올려다보며 와이어트는 물었다.
“정말이에요?”
“글쎄요, 다음 질문.”
“러시아에선 뭐라고 불렸죠?”
그녀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와이어트의 가슴 위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와이어트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H…E…X….A. 그 뒤의 글자들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런 성이 존재한다고?’.
“모든 건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곳에 오게 된 것도, 아이들을 만난 것도, 당신과도… 그렇지만, 이곳에서 점점 제 상처가 아무는 것을 보고 확신했죠. 운명이란 것을요.”
한동안의 침묵 후, 와이어트는 자신의 오른쪽 뺨에 낯선 온기가 흐른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가에서 마스카라가 번져가고 있었다. 그녀는 수수께끼였다. 넌지시 던지는 질문과도 같은 그녀의 모습은 와이어트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어떠한 명료한 답을 생각나게 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괴로운 듯 그럴 때마다, 더욱 세차게 몸을 움직였다. 그것이 마치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그는 그녀의 슬픔과 고통을 공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그 역시 그것이 얼마나 깊은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혼자 내버려 둘래요?” 한참을 운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요?”
“그럴 수는 있고요?”
“솔직히? 아니요.”
와이어트의 대답에 그녀는 더 크게 웃었다. 마치 가소롭다는 듯이 한참을 웃던 그녀는 잠시 뒤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잘 봐요.” “어떤 걸요?” “눈을 떼지 마세요, 저에게서.” 그녀는 그의 위에서 허리를 일으키고 팔을 벌렸다. 그녀의 백옥 같은 육체가 밝은 빛을 뿜는 전등에 가려져 황홀한 그림자를 형성했다.
“그 말 참 많이 했었죠. 누구도 제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럴수록 즐겁다는 듯이 저를 짖뭉게고 아프게 했죠. 담배 세 갑도 되지 않은 돈에 매일같이 저는 망가져갔어요.”
와이어트는 고개를 세웠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잘 봐요. 이제부터 제가 무엇을 하는지. 이건 저의 트라우마예요. 저는 모든 남자와 할 때마다 그때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싸워요. 그리고 그때마다 저는 항상 이겨버리죠.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어요. 맞서 나아가세요. 제가 배운 건 가기 싫어하는 곳에 늘 배울 것이 존재한다는 잔인한 사실이에요.”
말과 함께 그녀의 몸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신음과 와이어트의 탄식은 같은 박자를 그려내며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