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
불쑥 호주로 떠났다. 명목은 어학연수였지만 어떤 계획도 없었다. 나의 호주생활은 먼 친척뻘이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도착한 호주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영어가 안된다는 소극적인 마음으로 아르바이트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냉담자로 지냈던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진행되는 미사참여를 매일 하였고, 한국에서 출발할 때 선물 받은 묵주를 손에서 놓치 않았다. 빠르게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결정했다면 고생은 덜했겠지만 떠들썩하게 떠나왔던 한국을 빠르게 복귀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한국에서 언니 힘든 거 없냐고 먼저 물어와 주었던 동생 M이 있다. 그때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이메일이거나 편지였다. 가끔 시간 될 때 국제전화카드를 구매해 통화하는 정도였다.
나는 그때 동생 M이 보여준 정성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가끔 통화 나눌 때 했던 얘기들을 놓치지 않고 한 달에 한번씩 편지와 함께 국제택배를 보내왔다. 새로 이사한 곳이 수영장이 있다고 하니 수영복을, 발이 시리다고 하니 양말을 보내왔다.
그중 한국에서 유행이라며 보내온 장혜진 6집을 나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나는 동생 M 덕분에 고향의 향수를 달랠 수 있었고, 한 달에 한 번씩 받아보는 편지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동생 M은 여전히 나를 챙겼다. 지금처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퇴근길 케익을 항상 나에게 건네주었고, 혹여 내게 무슨 일이 있을라치면 가장 먼저 달려와 주었다.
오랜 시간 같은 분야에서 함께 일을 했기에 공감대도 같았고, 서로가 책임자 역할을 하다 보니 짬을 내어 만나 서로의 애로사항을 풀기도 하였다.
나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지만 어느 때는 언니처럼 느껴질 만큼 언제나 지혜로웠다.
지금은 각자가 다른 일들을 하며 생활하고 있지만 나는 언제나 동생 M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 함께 해준 만큼 지금 힘들어하는 동생 M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음이 안타깝다.
힘들 때는 연락해라고 했지만 그녀는 성격상 힘들다고 투덜대지도 않기에 묵묵히 지낼 것이다.
사람의 관계가 언제나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물리적인 시간은 어쩔 수 없더라도 마음 안에서는 언제나 함께한다고 생각한다.
동생 M이 내게 보여준 정성을 나는 똑같이 갚을 수 없다. 그때만을 생각하면서 언니지만 동생처럼 투덜댈 수도 없다. 나는 그런 시간들을 이제는 붙들지 않으려 한다. 그래야 서로의 서운함도 없지 않을까...
지금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확연히 달라졌기에 지금과 어울리는 모습으로 함께하면 되는 것이다.
가장 어렵고 힘들었을 때 멀리서 나를 지켜준 동생이기에 지금은 그냥 그녀가 기대오기를 기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