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일리치의 죽음_톨스토이(세계문학전집 438, 민음사)
왜 톨스토이인지 알수 있는 짧은 소설. 이렇게 짧은 줄거리로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고를 가능하게 하며
읽기도 쉽다. 심지어.
결국은 톨스토이로 회귀하게 되는건가. ㅎ
진짜 톨스토이 짱!을 외치며 술술 읽어내려감.
미리 맛보는 죽음에 대한 생각. 그럼에도 우울하지 않아.
p.9
가까운 지인의 죽음 자체는 늘 그렇듯 부고를 접한 모두에게
내가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p.59
문제는 맹장도 신장도 아니야..삶과 죽음의 문제다. 그렇다. 삶이 있다가 지금 떠나는, 떠나는 중인데도
나는 그것을 붙잡아 둘수 없다. 그렇다. 뭣하러 나 자신을 기만할 것인가?
내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나만빼고 모두 분명히 아는데. ....
'내가 없다면, 그럼 뭐가 있을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내가 없어진다면 대체 나는 어디에 있게 되는 것일까? 정녕 죽음일까? 안돼, 싫어'....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이런 끔찍한 공포를 겪어야하는 운명을 타고났을리 없었다.
p.64
죽음은 단순히 생각에 머물지 않고 엄연한 현실로 다시 돌아왔고, 그의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죽음이 머무는 자리에 다른 생각들을 차례차례 불러들였고, 거기서 의지할 데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여태껏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가려주었던 지난날의 의식의 흐름속으로 되돌아 가려고 애썼다. ...무엇보다 최악은 그것이 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는 점이었다. 그가 무얼 하도록 유도하는게 아니라 오직 그것만을
똑바로 응시하도록, 그것을 응시하며 아무것도 못하고 표현하지도 못할 만큼 고통스러워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위안이 될만한 다른 방어막을 찾아 헤맸고 그 다른 방어막이 나타나서 잠시나마 그를 구원해주는 듯도 했지만 금방 또 다시 허물어졌다. 아니 투명해졌다. 그 때문에 그것은 모든 것을 꿰뚫고 침투했으므로 무엇으로도 가릴수 없었다.
p.74
혹은 그때문에 더더욱 이반일리치를 괴롭힌 것은 아무도 그가 바라는 만큼 그를 불쌍히 여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기나긴 고통을 맛본 뒤에 이반일리치는 때때로 이렇게 고백하기가 창피스럽지만, 누구든 자기를 아픈 아이처럼 그저 불쌍히 여겨주길 무엇보다 바랐다. 아이를 어루만지고 달래주듯 상냥히 쓰다듬고 입을 맞추고 자신을 위해 울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p.88
'너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그가 들은 최초의 분명하고도 강력한 계시는 이렇게 표현되었다.
'무엇이 필요한가? 대체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그는 자신에게 되뇌었다. '무엇이냐고? 고통받지 않는 것? 사는 것?' 그가 대답했다.
'사는 것? 어떻게 사는 것 말이지?' 영혼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야 예전처럼 잘, 유쾌하게 사는 것 말이다.'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던가, 잘, 유쾌하게?' 목소리가 물었다. ...그런데 기함할 노릇이었다. 유쾌한 인생의 모든 최고의 순간들을 이제와서 돌아보니 전혀 다르게 여겨졌다. ....
어린 시절에서 멀어질수록, 그리하여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그 기쁨들은 더 하찮고 의심쩍게 변했다.
....저 죽음과 같은 업무와 돈 걱정, 그렇게 일 년, 이 년, 또 십년, 이십년 모든 것이 한결같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죽음 같다. 산을 오른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꾸준히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랬다. 사회통념으로 보기에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정확히 그만큼 삶은 내 밑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자, 준비 끝, 죽어라!
그래서 이건 무엇인가? 대체 왜? 있을수 없는 일이다. 삶이 이토록 터무니 없이 역겨울수 있을까? 정확히 그토록 역겹고 터무니 없다면 대체 왜 죽어야하며, 또 왜 죽어가면서 고통받아야하는가? 이건 뭔가 잘못 되었다.
p.93
더 옛날에 이를수록 삶은 더 풍부해졌다. 삶에서 좋은 것도 더 많고 삶 자체도 더 풍요로웠다. 이 쪽과 저쪽이 함께 뒤섞였다.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듯 삶도 점점 더 나빠졌군'.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속도는 반비례로 더 빨라지는군' ..그러자 가속도가 붙은 채로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돌덩어리가 그의 영혼에 쿡 처박혔다. 삶도, 커져만가는 일련의 고통도 점점 더 빨리 끝으로, 가장 무서운 고통으로 치닫고 있다.
p.97
자기가 삶을 잘못 살아왔다는, 예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그런 가정이 사실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가장 높은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 투쟁하려는 충동, 그가 당장 떨쳐내려했던 아득한 저 충동이야말로 진짜고 나머지는 모두 잘못된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
'그러니까 내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망쳤다는 의식을 지닌채 삶을 떠난다면, 그걸 바로잡을수조차 없다면 그때는 뭐지?' 그는 똑바로 드러누워서 자기 인생을 통째로, 완전히 새로이 되집어 보았다. ....그들에게서 그는 자신을, 그의 삶을 지탱해온 모든 것을 보았고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또 이 모든 것이 삶과 죽음을 뒤덮은 끔찍하고 거대한 기만임을 또렷이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