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한가운데에서 경상도 사투리라니?"
음료를 주문하던 남자가 웃으며 여자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한다.
"표 났어예?"
받아친 내 말의 끝자락을 잡고 그들은 즐거움의 급류를 탄 듯 난장이다. 평소 진지하게 신경을 쓰며 말을 하는 경상도 친구가 있는데 자신은 절대 사투리를 안쓴다고 생각하더라며 두 사람은 서로의 일화를 들먹이며 허리를 꺾는다. 그게 저리 웃을 일인가 싶은데 나도 허리가 꺾였다. 여자의 웃음이 '갤갤갤갤' 소리에 가깝게 길게 이어지는데 그녀의 웃는 모습과 특이하고 재미있는 웃음소리에 나의 웃음보도 터졌다. 웃음을 참지 못해 된통 당한 기억이 있는 나로서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울다가 쉬다가 다시 울다가,로 이어지는 곡소리처럼, 웃다가 잦아들다가 킄킄대다가 눈물까지 찍어내가며, 단 몇 분 봤을 뿐인 손님과 한바탕 자지러
졌다.
쭈꾸미 낚시 갔다온 피로가 다 풀렸다며 마지막 웃음을 거뒀는데, 나 또한 웃고 나니 개운하고 생기가 돌았다.
두 사람은 아주 편하고 대화가 잘 통하는 부부로 보이는데 뭐라 말하기 힘든 신선한 무엇이 느껴져서 자꾸 눈길이 가고 귀가 모아졌다.
카드결제를 하면서 남자에게 여자의 매력을 말했다. 그리고 여자에게,
"부부시잖아요?......근데 어떻게 중년의 부부가 이렇게 신선할 수가 있죠?"
"아직 부부는 아니고......서로 잘 해야하는 때죠."
여자가 아주 시원스럽고 투명한 답변을 던지고는 여기땜에 보령 또 와야겠다고 남자를 보고 말하며 문을 나섰다.
이곳에서 내가 어떤 억양으로 말을 하고 있는지 한번도 신경써본 적이 없다. 아이들과 통화하듯, 이웃들과 말하듯 그냥 이야기할 뿐이다. 나 역시 충청도 억양이 처음에나 흥미로웠지 말이라는 것이 그 지역에 오래 산 사람에게는 그냥 공기처럼 땅처럼 바다처럼 호흡처럼 자연같은 일이라 여기기에 굳이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말씨가 첫인상같은 일인가 보았다.
하기야 간혹 낚시나 업무관계로 남쪽에서 온 사람들의 진한 경상도 말, 특히 바닷가 사람들의 말투를 들으면 무심하기는 힘들다. 듣기가 너무나 편해서 두 귀에 팔이 달린 듯 저절로 'open arms' 상태가 된다.
손님들이나 지인이나 지인의 지인의 소개로 온 사람이나 마을 주민들에게 반복적으로 듣는 말이 있다.
어떻게 경상도에서 충청도까지 오게 되었냐는거다.
답변은 두 가지인데 사람에 따라 둘 중 하나를 답하게 된다.
충청수영성 주변 풍광에 반해서라는 단편적인 것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좀 얼토당토 않을 수 있는, 그리고 뭔가 새로운 정보를 기대하며 하는 답변이다. 나도 아직 모르는, 듣고 싶은 무언가를 바라며 하는 답변이다.
고 2때 수학여행을 백제권 유적지로 갔다. 7월 초 쯤이었다. 수학여행 내내 비가 잦았다. 관광버스 안에서 놀다가 자다가를 반복하다 갑자기 눈을 떴는데 창밖에는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그 사이로 앞 발을 치켜든 말을 탄, 갑옷 입은 장수의 동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버스가 로터리를 도는 바람에 아주 잠깐 그 장면을 봤을 뿐인데 뜬금없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백제의 딸이었구나.'
열 여덟 초여름의 일이 40여 년이 지난 이제서야, 이곳까지 온 연유를 묻는 어떤 이의 물음에서 불쑥 생각났다. 판단과 비교 이전에 직관이 먼저 달려나와 '백제의 딸'이야기와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어떤 경험들은 금방 연결되고 또 어떤 경험들은 때늦은 사과처럼, 묵은 후회처럼 무용한 듯 자리를 찾기도 한다. 그냥 뭔가를 연결짓고 싶은 건지 아님 어떤 연관이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발자국 중의 하나가 쬐끔 연관 색상을 띠고 있다는 얘기다.
때로는 뜬금없는 일이 니체의 '어쩌면' 만큼이나 비약에서 진화의 디딤석으로 하나 둘씩 쓰였는지도 모른다.
말하고 보니 뜬금없는 '백제의 딸'이 진짜 '나'같기도 하다. 모임차 들른 곳에서 덜컥 계약을 하고 뜬금없이 이 곳에서 살고 있으니.
뜬금없음, 덜컥, 어쩌면이 모두 다른 얼굴이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