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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괴설 Mar 12. 2024

[화조풍월 연작 1] 花 : 고무나무를 품은 흙

 잊어버린 아름다움에 관하여

화조풍월 (花鳥風月)

명사 | 꽃과 새와 바람과 달이라는 뜻으로, 천지간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


일반적으로 풍류를 일컫는 말이며, 혹은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쓰인다.




        규조토 화분 속의 흙은 모든 게 권태로웠다. 이따금 몸을 적시는 물도, 어쩌다 한 번씩 들어오는 노란 영양제도, 매일 잠시 왔다 가버리는 햇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흙에게 권태롭게 느껴진 건 자신의 한가운데로 깊게 비집고 들어온 고무나무의 뿌리였다.

      흙에게 고무나무는 골칫덩이일 뿐이었다. 물론 언젠가는 흙도 고무나무를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자신이 꼭 안아주어야 넘어지지 않는 존재. 자신의 품 안에 들어와 모든 걸 맡기는 연약한 존재를 싫어할 이가 있을까. 게다가 그런 존재가 '나무'라니. 규조토 화분 속의 흙은 자신이 나무를 품은 흙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고, 이제 흙에게 고무나무는 뿌리로 몸을 찌르고, 물을 뺏어가는 거슬리는 이웃처럼만 느껴졌다.

      나무는 걸리적거리기만 해. 내가 없어도 넘어지지 않을 거 같은 그런 나무 말고, 더 얇은 뿌리를 가진 친구를 품고 싶어. 기왕이면 예쁜 꽃이면 더 좋겠다.

다만 흙에게는 고무나무를 밀어낼 힘이 없었다. 더욱이 꽃을 품을 선택권도 없었다. 그래서 흙은 고무나무가 자신을 떠나게 만들기로 했다. 그때부터 흙은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물을 억지로 꽉 붙들어맸다. 고무나무의 뿌리로는 한 방울도 가지 않도록. 아무리 무거워져도 흙은 물을 뿌리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그러다 그러다 도저히 더 이상 물을 못 잡을 거 같을 때엔 그냥 규조토 화분 밑으로 흘려버렸다.

      그러기를 몇 주 째 반복하니 드디어 고무나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흙은 이제 목표에 거의 도달했다 생각했다. 조금씩 앓아가던 고무나무의 뿌리가 흔들리는 거 따위는 괘념치 않았다. 그 대신 새롭게 품을 꽃의 뿌리를 생각했다.

      정신을 차린 흙은 무언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이 넓게, 아무렇게나 퍼져있었다. 흙은 아직 모든 게 어리둥절했다. 꽃은 어디 있어? 주변에는 화분은커녕 온갖 쓰레기들과 또 다른 흙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찌꺼기들이 가득했다. 규조토 화분은? 그게 내 집인데? 그때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더기였다. 화분 같은 건 없다. 그건 쓸모 있다. 너는 아무 일도 못하는 쓰레기다. 그제야 흙은 고무나무가 떠올랐다. 그럼 고무나무는? 구더기가 흙 위로 느릿하게, 그리고 진득하게 올라타면서 대답했다. 쓸모 있는 고무나무는 쓸모 있는 흙이 새로 품었다. 쓸모없는 너는 고무나무가 아니라, 규조토 화분이 아니라 이곳에 속한다. 널브러진 흙 위로 수많은 구더기들이 올라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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