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를 원하는 딸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 나에게 사귀자고 할 때마다
진지한 눈빛으로 고백했던 말이 있다.
"나는 결혼 후에도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해. 어쩌면 동생까지도. 그래도 괜찮겠어?"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진지함이다. 나의 이러한 고백은 대학교 입학하자마자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나만큼이나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준 이들도 있었지만,
분명 '이 여자가 왜 이렇게 앞서나가나.' 당황했던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저 사귀어보자는 말에 이렇게 나오는 여자라니, 덜컥 겁을 먹고 도망가버린 이가 없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무엇이든 찝찝한 부분을 견디지 못하는 나의 성격은 아마도 아빠를 꼭 닮았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빠는 엄마에게 고백을 하기 전, 자신의 처지를 한참이나 털어놓았다고 한다.
본인이 얼마나 가난한지, 홀어머니에 누이와 동생을 책임지는 장남의 역할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
앞으로 자신과 결혼하게 되면 닥칠 일들이 얼마나 힘겨울 수 있는지에 대하여.
해맑기만 했던 철부지 엄마는
멋들어져보이기 위해 애쓰는 남자들만 보다가
아빠에게 아주 신선한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이 지나치게 솔직한 남자의 진지한 말에 다가올 미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저, 이보다 더 미더운 사람은 없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덜컥 아빠의 고백을 받아들였다며 들릴듯 말듯한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 시절, 나의 아줌마들'에서도 몇 번 언급되었다시피,
나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장남이 꾸린 집안의 장녀였다.
굳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맏이란 응당 부모의 노후와 형제자매들의 발판이 되어야 함을
나는 아빠를 보며 배웠다. 아니, 엄마의 하소연을 들으며 배웠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우리집은 다행히, 아빠가 자라온 집처럼 버겁도록 가난하지는 않았으나, 아픈 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점은
우리집의 맏이는 아들이 아닌 딸이었다.
동생은 내가 일곱살 되던 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름의 평생을 외동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낯설고도 당황스런 존재였다.
뒷전이 된다는 것을 겪어보지 못했고,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나의 기억에 자리잡았던 말들은
"우야노. 이제 니가 참말 장남이대이."
하는 외갓집 어른들의 말씀이었다.
나름 신여성 엘리트 출신의 할머니는 딸만 둘을 내리 낳은 며느리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으나
외갓집 식구들의 마음은 조금 달랐다.
시집살이를 하는 막내딸에게 딸 하나만 있다는 것이 눈치가 보였던 와중에
엄마의 임신 소식은 외가어른들에게 내심 반가운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동생까지 딸로 태어나자
아들이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애써 숨기고 살았던 외가어른들의 노력은 기운이 꺾였다.
그리고 그 마음은 가감없이 나에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곱게 키운 막내딸이 혹여 시댁의 미움을 받게 될까봐, 막 태어난 손녀까지 애물단지 취급이 될까봐,
무엇보다
막내딸의 노후를 든든히 지켜줄 아들이 없다는 것에 대한 걱정은
외가어른들, 특히나 외할머니의 속을 미어지게 했던 것이 분명하다.
내가 외갓집에 갈 때마다 외할머니는 그 많은 손주들을 헤치고 나를 잡아 끌어 무릎 위에 앉히시고는
"니가 열 아들 안 부러운 딸이 될끼다. 장남 못지 않은 장녀가 되어야 한대이."
하며 볼도 부비시고 머리도 쓰다듬으시며 소근대셨다.
나는 특별한 애정을 받는듯 하여 으쓱했으나, 사는 내내 외할머니의 그 말씀들을 쉬이 내려놓지 못했다.
나에게 고백을 하는 남자들에게 '나는 장남' 이라며 힘주어 강조할 때마다
이러다 나는 영영 결혼을 못하는게 아닐까 싶은 걱정이나
결혼했다가도 소박 맞는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들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 나의 코 끝에서는
어린시절 내게 소근대던 외할머니의 들큰하고도 푸근했던 향이 나곤 했다.
부모의 봉양과 가족의 기둥이라는 거창한 역할 말고도
맏이라는 것에 대한 기대치는 사는동안 불쑥불쑥 내 앞을 막아서곤 했다.
큰 놈이 잘 되어야 작은 놈이 잘 된다는 당부를 넘어
큰 놈이 본을 잘 보이지 않은 탓이라는 질책까지,
어린 나이에도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항변하고자 할 때마다 그러한 나의 모습은 '맏이답지 않은 행동'으로 치부되었기에
어른들의 쯧쯧 소리만 높아질 뿐이었다.
그러므로 언젠가부터 나는
동생이 부모님께 혼나거나, 문제되는 일이 생겼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게 되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동생에게 생기는 일련의 문제들은 나로 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설익은 어른이었을 때에,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가 막 되었던 때에는
나의 이런 기억들이 부당한 대우였다고 여겨졌다.
어른이 되어보니 어느새 세상은 바뀌어서
장녀는 커녕, 장남들도 부모님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는 세상으로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의 부모님은 그 옛날 나에게
"나중엔 너가 우리 모시고 살아야지?" 라던가, "동생도 너가 책임져야 한다." 라는 말들을 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계셨다.
내가 "아빠가 나한테 그랬었거든요?" "엄마가 나한테 맨날 그랬었잖아." 라고 말하면
그냥 한 말이었다거나, 내가 언제 그랬었냐며
별 걸 다 기억하고 산다는 듯한 당황스러운 반응이 돌아오곤 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어린시절부터 장남 역할을 해야하는 장녀라는
무거운 각오를 깊숙이 새기고 살았던 것일까.
첫째가 잘 되어도 둘째가 힘든 집이 있고, 첫째가 본이 되지 못해도 둘째는 든든히 자란 집이 있는데,
왜 나는 동생과 심지어 사촌동생들까지도 내가 길을 터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살았던걸까.
둘째딸을 낳았을 때에 나는
팔뚝보다도 작은 아기를 끌어안고 가만히 속삭였었다.
"둘째라고 섭섭한 일은 만들지 않을게. 엄마는 맏이라 둘째의 마음은 잘 모르지만,
죄다 언니 옷을 물려 입히거나, 언니에게 해 준 것을 너에게는 해주지 않는 그런 일은
만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 할게."
그리고 막 언니가 되어 잠든 첫째의 귀에 대고는 나지막히 말했었다.
"장녀라고 무겁게 살지 않도록 할게. 몇 년 더 일찍 태어났다고 몇 배의 책임을 지고 살지는 않도록 할게."
둘째에게 속삭일 때에는 나름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면
첫째에게 읊조릴 때에는 눈물이 맺혔던 것도 같다.
겨우 두 돌이 지난 어린 아이가
혹여 살면서 내가 느꼈던 버거움을 겪게 되면 어쩌나,
배운게 그것뿐이니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짐을 지우면 어떻게 하나,
마음이 자꾸 쓰라렸다.
나는 꽤나 애쓰는 엄마이긴 했다.
내가 모르는 둘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자 막내인 지인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열심히 물어보았고,
단순하게는
첫째가 배웠던 것들, 누렸던 것들은 어떻게든 둘째에게도 해주려고 노력했다.
둘째가 태어나며 일을 그만두었고, 아이 둘을 키운다는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노릇이긴 했으나,
그럼에도 물려주는 옷 사이에는 새 옷 하나 정도는 꼭 끼워넣으려고 했고,
쑥쑥 크는 첫째의 신발을 사 줄 때에는 둘째도 하나씩은 손에 쥐어주려고 하며 키웠다.
무엇보다 내가 애쓴 것은
첫째에게
언니가 잘 되어야 동생도 잘 된다. 라거나
너가 그러니까 동생도 그러지. 라는 등의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중에 엄마아빠가 없을 때에는 네가 동생의 보호자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나중에 서로의 보호자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말로 바꿔 전하며
아이 둘을 키우는 순간 순간, 그 날의 결심을 기억하고 되새기곤 했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이 요구하는 것은 나의 노력보다 큰 것이었다.
어제의 첫째가 오늘의 엄마가 되고나니
세상은 어느새 변해서 나는 더더욱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어린 시절, 내가 바랐던 적 없는 것에 대한 요구나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질책을 받을 때마다 느껴지던
왠지모를 억울함.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 오랜만에 그 시절의 비슷한 감정을 마주치곤 했다.
다만 달라진 것은
K장녀로서의 버거움이 아니라
K장녀가 오늘날의 엄마가 되었을 때의 당황스러움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인지하지는 못했으나
알게모르게 쌓여가던 그 감정은
어느날 밤, TV속 육아전문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터져나오고 말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