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I'm a Korean. Republic of Korean.
국민학교 3학년때였나.
선생님은 우리에게 대한민국의 특별함에 대해 설명하던 중이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서 살기가 좋지. 전세계에 이런 나라는 몇 없어. 우리나라랑 미국? 중국? 그 정도지."
어떤 남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선생님. 영국도 사계절이에요!"
우리는 모두 우와. 하는 표정으로 그 아이를 감탄한 후, 얼른 선생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지. 영국도 사계절이 있어. 그런데 거긴 섬나라잖아."
사계절과 섬나라의 상관관계는 알 수 없었으나, 선생님의 대답은 우리에게 더 굳건한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다.
"맞아! 일본도 사계절인데 거기도 섬나라잖아."
한 아이의 큰 목소리에 맞춰 우리는 모두 "와아아!" 환호성을 지르며 다같이 박수를 쳤었다.
교실 안 빼곡히, 60여개의 자부심이 일렁이던 순간이었다. 나는 그 때 우리나라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아직까지도 그 벅찼던 감정을 잊지 못한다.
그 때 선생님이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는지, 아니면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심어주시려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해외여행은 커녕, 먼나라의 소식은 접하기 쉽지 않았던 시대.
길거리에서 외국인이라도 만나면 모두가 신기한 존재를 만난듯 시선을 떼지 못했던 때의 우리들은
그저 학교에서 TV에서 가르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움을 성실히 받아들이고 믿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 인구가 많아 발전가능성이 무한한 나라. 단군할아버지로부터 세종대왕과 이순신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처럼 작지만 강한 나라는 우리에게 없었다.
일제시대와 6.25를 겪고나서도 세차게 일어선 민족. 곳곳에 붙어있는 '관광의 나라' 라는 포스터는 우리나라가 가장 볼꺼리가 많은 선망의 나라라고 믿게 하였고, 뉴스에 나오는 산업일꾼들을 보며 전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었다.
가난한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국가에서 관광사업에 열을 올리는 것이라는 것, 외화를 벌기 위해 해외각지에서 손발이 부르트도록 아버지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자라면서 나는
우리나라가 내가 배웠던 것만큼 대단한 나라가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미제 장난감이나 일제 학용품이 탐나던 시절을 지나, 나의 중학교시절에는 아예 해외로 유학가는 친구들이 생겨나면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작고 볼품없는 위상을 지녔는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유학을 간 친구들은 방학때마다 뭔지 모를 세련됨을 입고 나타났고, 그들이 해주는 그 곳의 이야기는 듣도보도 못했던 신세계였으며, 그들로부터 종종 전해지는 인종차별이나 서러운 경험들은 더더욱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 대한 믿음에 의문을 품게 했다.
게다가 시야가 넓어지며 일찌기 알지 못했던 나라가 얼마나 수많은지를 깨닫게 되면서
나는 어릴적 자랑스러워했던 개발도상국이라는 단어가 해외에서는 그닥 엄청난 타이틀이 아니라는 것, 올림픽을 치루어냈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게 되었다. 물론, 사계절이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말고도 수없이 많다는 것 또한.
단군의 피를 자랑스러워하고, 식민지와 전쟁을 너끈히 이겨낸, 그 어느 나라보다도 자랑스러웠던 대한민국의 위치를 여실히 느꼈던 계기는 대학시절 떠났던 어학연수에서였다.
우리나라가 대단한 국가가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은 일찌기 하고 있었으나,
우리나라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수 있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유별나게 한국인이 없는 곳이었기에 더더욱 그랬겠지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북한에서 온거냐며 아주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어봤다. Republic of Korea보다 North Korea가 더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은 이국땅을 막 딛은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우리에게 그토록 자랑스러웠던 86아시안올림픽과 88서울올림픽조차 모르는 이들 투성이었고, 간혹 우리나라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나이드신 분들은 6.25전쟁을 기억한다며 나를 전쟁난민을 바라보듯 안쓰러운 얼굴로 대하기도 하였다.
낯선 이들은 나의 모습을 보고 중국인이냐고 묻거나 일본말로 인사를 건넸고, 수업시간 부동산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울의 집값을 듣고는 의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나를 화나게 했던 것은, 삼성이나 현대를 일본 브랜드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다이와 쌈쏭이 코리아 것이냐며 반문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되려 나에게 다시 알아보라며 일본 브랜드로 알고 있다고 하는 친구에게 나는 울그락 불그락대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전세계 산업을 일구어내는 힘이 있는 나라, 전쟁을 딛고 아시아의 용으로 솟구쳐오른 나라,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그저
아시아 어느 곳의 가난한 나라. 전쟁의 소용돌이를 견뎌낸 안쓰러운 나라 정도였던 것이었다. 아니, 그마저도 아는 이 별로 없는 이름모를 어느 나라였을 뿐이었다.
그것이 70년대도 아닌, 90년대 후반의 우리나라 현주소였고, 나는 그동안 배워온 것들에 대한 배신감과 우리의 자부심이 부정당했다는 억울함에 자주 주먹을 쥐었다.
"No, I'm a Korean."
중국인이냐, 혹은 일본인이냐는 질문에 주먹을 쥐고 힘을 주어 대답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Korean이라는 대답에 갸우뚱 하는 이들에게
'Korea를 모르다니 너 참 무식하구나.' 싶은 표정으로 턱을 쳐올리고 지나가는 것이
작은 나라 국민이 지켜낼 수 있는 자존심이었다.
길거리에서도 휴지는 꼭 휴지통에 버렸다. 신호를 위반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다같이 어울려 pub에서 한 잔을 하더라도 품위는 잃지 않으려 애썼고, 모두에게 세련된 태도를 취하려 노력했다.
우리나라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처음 만난 우리나라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왠지모를 사명감을 갖게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름모를 어느 나라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꽤나 긴장하며 지냈다.
그것은 꽤나 서글픈 일이었다. 길거리에서 나를 보고 두 눈을 찢어보이며 놀리는 동네 못된 꼬마들이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yellow monkey라는 빈정거림보다 나는 대한민국을 모른다는 것이 슬폈다.
그들이 놀려대는 아시안에조차 코리안은 없었다. 놀림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평생을 믿고 살았던 놀라운 우리나라는
우리들만의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알지 못하는, 알 필요가 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로 돌아와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믿지 않았다.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우리들만의 자부심을 믿고 싶지 않았다.
IMF를 이겨낸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에 대해 모두가 박수를 칠 때에도
나는 반만 믿고 덮어두었다.
박세리, 박찬호가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일 때에도 나는
적당히 걸러서 듣고 받아들였다.
해외에 살고 있는 지인들이
요즘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할 때에도 나는
그래봤자, 라고 치부하고 밀어두었다.
사계절이 있는 나라는 미국,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라 했던 선생님, 그리고 더 많은 거짓말을 가르쳤던 것들에게
나는 다시는 속지 않겠다 단호히 다짐했다.
우리나라에 대해 냉소적인 판단을 유지했던 것은
나는 나 자신을
이름모를 작은 나라에 살더라도
근거없는 자부심으로 착각 속에 사는
무지한 국민으로 놔두지 않겠다는 결심 같은 것이었다.
20여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우리나라는 월드컵을 치루었고, 놀라운 경제성장을 보였으며,
예술문화뿐 아니라, 운동과 연예계까지도 해외로 뻗어나갔다. 아니, 뻗어나갔다고 들었다.
우리나라의 위상이 그 사이, 월등히 높아진 것은 알 수 있었으나
연일 들려오는 누가 국가위상을 드높였다는 소식이나, 해외에서 각광받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뉴스들은
반갑기 그지 없는 일이었으나, 어느정도 깎아서 듣게 되는 인색한 뒤끝은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살았다.
그리고 몇년 전,
나는 아이들과 함께 유럽여행을 떠났다.
20여년 전 나에게
북한에서 왔냐고 물었던 곳. 현다이는 일본브랜드라고 말했던 곳.
엄마가 보내주신 김치를 보며
코를 막고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던 이들을 만났던 곳.
나, Korean은 또다시 그 곳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