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한 딸이 있었지
그 당시 할머니는 학교선생님이셨다.
엄마는 나와 할머니를 위해 식모아줌마를 불렀다고 했으나
사실 아줌마와 하루종일 붙어있어야 하는건 나 혼자였다.
할머니는 깐깐한 분이라
식탁은 매일 풍성해야 했고, 집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했기에
어린 딸을 맡기는 일 말고도 할머니의 기준을 맞추려면
엄마에겐 식모가 꼭 필요했을 것이다.
엄마가 아줌마와 바톤터치를 하고 학원으로 출근을 하고 나면
나는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바깥동향만 살폈다.
엄마가 나오지 말래도 풀방구리 쥐나들듯 하던 내가
아줌마가 불러도 방문만 빼꼼이 열고 버티던 날들이 꽤 됐다고 기억한다.
방 안에 있으면서도 아줌마가 궁금하긴 해서
방문 틈에 눈을 붙이고 아줌마가 뭐하나 살피기도 했는데,
아줌마는 엄마가 나가고 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소파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신문도 읽곤 했다.
엄마가 이거도 저거도 해 달라던 부탁을 나도 기억하는데
'저 아줌마가 아무것도 안해놔도 울엄마는 말 한마디 못할거야.'
나는 방 안에서 안달이 나기도 하고, 신경질이 나기도 했다.
꼬장꼬장한 할머니가 학교에만 가지 않는다면,
호랑이같은 울아빠가 회사에 가지 않았다면.
명자언니 등짝을 찰지게 때릴 줄 아는 지영이 아줌마라도 불러오고 싶었다.
아줌마가 밖에 있으면 방에 들어와 있고,
내 방을 청소하러 방에 들어오면 후다닥 마루로 뛰어나가는 날들이 며칠 지난 후에야
나는 조금씩 아줌마와 말을 트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해보면 아주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주스를 따라달라거나, 장난감을 찾아달라 부탁을 하면
말투가 다정하지 않을 뿐이지 척척 도와주곤 했다.
그러나 점심시간에 집에 들른 엄마의 표정은
늘 무언가가 마뜩찮았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봐도 아줌마는 오전내내 게을렀다.
나는 지영이 아줌마처럼
시원하게 잔소리 한 번 못하는 엄마가 갑갑하고 안쓰러워
아줌마가 다시 미워지곤 했다.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아줌마는
엄마가 다시 학원으로 가고 나면 툴툴대는 혼잣말을 해가며 돌아다녔다.
이 집은 무슨 저녁반찬이 이렇게 많냐는둥,
먼지 한 톨 없는데 뭘 그리 쓸고닦고 하냐는둥,
혼자 노닥대다가 꼭 뒤늦게 후닥대는 아줌마의 루틴에는
나와 놀아줄 틈이 없었다.
아니, 나도 별로 같이 놀고 싶지 않았다.
아줌마가 제일 시간을 많이 보낸 곳은 소파와 식탁이었지만,
종종 안방 엄마 화장대 앞에 앉아서는
훔치던 걸레를 저만치 밀어놓고 이것저것 엄마 화장품을 살피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왠지모를 불안감과 불쾌함이 올라와
괜히 옆에 가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버티고 앉았었는데
꼬맹이가 티를 안 내봤자라, 아줌마는 나를 보고 성가시다며 가라고 퉁박을 주곤 했다.
엄마만 없으면 언제든 옆집으로 뛰어가 명자언니와 있을 수 있다 생각했던건
내 오산이었다.
자꾸 안방에 가서 앉는 이 아줌마 때문에
나는 명자언니는 커녕, 옆집 근처도 못 가는 날들이 많아졌다.
우리집을 지켜야 했다.
어느날, 저녁에 돌아온 엄마가 안방을 훑어보고는
"아줌마가 안방에 자주 들어오니?" 묻길래
엄마가 나가기만 하면 일도 안하고 소파에서 커피만 마신다고 시원하게 떠들어댔다.
엄마 화장대 앞에 자꾸 앉아 있어서
내가 꼭 옆에 붙어 지키고 있다며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엄마는 내 앞에서 별 반응을 보이진 않았으나
아주 언짢은 기색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날 밤, 퇴근한 아빠와 방문을 닫고 한참 안에 있는걸 보니
내가 고해바친 말들로 의논을 하는게 틀림 없었다.
내가 아줌마 정보를 엄마에게 전했음에도
그리 달라진 건 없었다.
엄마는 여전히 아줌마에게 깍듯했고
아줌마는 시뻘건 잇몸을 드러내며
엄마보다 두 배는 큰 목소리로 웃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명자언니가 아줌마는 어떻냐고 묻기에
내가 무엇부터 털어놔야 하나 말을 고르는데,
내 대답따위는 필요 없다는듯 피식 웃었다.
"나도 그 아줌마 싫더라. 만나면 사모님마냥 굴어. 지나 나나 똑같은 식모면서."
맞다. 이 아줌마는 명자언니와 너무 달랐다.
그 당시엔 마땅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으나 아줌마는
무례하고, 거칠고, 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줌마가 장을 보러 나가자 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혼자 집에 있는 것도 무서웠기에
신발 끝을 질질 끌며 쫓아나간 참이었다.
상가 지하에는 경남가게라는 단골 야채가게가 있었는데
아줌마는 그 가게의 대장 같았다.
늘 붐비던 가게 안에서 아줌마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사장님 내외에게 잔소리도 서슴치 않았고, 뜻모를 농을 던지며 우하하 웃기도 했다.
아줌마가 너무 부끄러워서 나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봐 걱정이었다.
나와 울엄마를 잘 알고 지내던 경남가게 사장님은
언제나 조용조용 차분했는데
늘 예의바르던 울엄마에게보다 벅벅대며 떠드는 아줌마에게
더 허물없이 대하는듯 하여 부아가 났다. 엄마에게는 한번도 저리 친근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영 기분이 좋지 않은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상가 끝자락에 있던 구멍가게 앞에서 아줌마는
"너 사탕 먹을래?" 예상치 못한 선심을 썼다.
분명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자꾸 기분이 좋아지려고 했다.
그렇다고 냉큼 좋은 기분을 내비치기엔 자존심이 상해서
"엄마가 사먹어도 된대?" 새초롬히 물었다.
"내가 사주는건데 뭐, 들어가서 하나 골라. 비싼건 안된다."
나는 아줌마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내키지 않는 표정과 그렇지 못한 속도로 가게에 뛰어들어갔다.
'엄마 돈이 아니니까 괜찮지. 사실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나는 무언가 그간의 보람도 느껴지고, 엄마가 허락않던 불량식품에 행복해서
아폴로를 쭉쭉 빨며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동네 아이들이 들고 나타나면 치사한 노력을 해서야 겨우 하나 얻어먹었던 아폴로가
내 손에 봉지째 들려 있었다.
"아줌마는 이름이 뭐야?"
명자언니처럼 아줌마 앞에도 이름이 붙어야 한다고 늘 생각하던 터였다.
나는 꽤나 용기를 내어 친하게 지내줄 맘을 먹었는데
아줌마는 세상 퉁명스러운 말투로
"그냥 아줌마지 무슨 아줌마냐." 라고 대답했다.
"그냥 아줌마? 그럼 그냥 아줌마라고 불러야지!"
물러서긴 자존심이 상하고, 캐묻기엔 용기가 없어서
집에 오는 내내 그냥 아줌마, 그냥 아줌마, 일부러 불러대느라
자꾸 아줌마에게 말을 걸었다.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며 내가 또 '그냥 아줌마'라고 부르니
아줌마는 아폴로를 빨며 맹랑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내게
"나도 너만한 딸이 있었지."
혼잣말인지 뭔지 모를 말을 했다.
엘레베이터에 들어서며
"그냥 아줌마 딸? 지금은 어딨는데?" 라고 묻자, 아줌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버렸어. 아파서 버리고 왔어."
그 순간 엘레베이터 문이 쿵 닫혔다.
이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은 이와
갇힌 공간에 둘만 있었다.
일곱 평생 그토록 무서운 순간은 없었다.
버렸다고 말을 하며 날 음흉하게 바라보기도 했던듯 하다. 아니,
왠지모를 미소를 짓기도 했던듯 하다.
유괴소식이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에 나오던 시절이었다.
잡혀간 아이들이 죽어서 돌아왔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던 때였다.
엄마 말로는 이 동네가 유달리 그런 사건이 많다며 조심시켰었다.
아폴로 더미를 냅다 아줌마 얼굴에 던지고, 살려달라 외치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