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장미소녀 명자언니
명자언니의 첫 인상은 내게 유별나게 또렷하다.
언제나 같은 모습이라 더더욱 또렷한지도 모르겠다.
디스코 머리도 하고, 포니테일도 하고, 인디언핀으로 조롱조롱 멋을 냈던 나와는 달리
명자언니는 언제나 똑같았다.
딱 달라붙는 단발에, 옆가르마를 타서 한쪽을 실핀으로 단단히 고정시켜 놓았던 언니의 헤어스타일.
옷 또한 명자언니는 주황색과 갈색의 스트라이프 티셔츠로 늘 같았는데
나는 그 옷이 너무 칙칙해보여서 언니가 간혹 다른 옷을 입으면
"언니 너무 이쁘다!" 며 일부러 호들갑을 떨어주기도 했다.
작아지지도 않는지 언니를 알고지낸 내내, 그 옷은 언니의 트레이드마크였고,
뻬뻬 미르고 작은 키에, 하얗고 동그랬던 얼굴에
이쁘지는 않았으나 코가 오똑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명자언니가 몇 살인지 몰랐다.
왠지 언니의 사적인 이야기는 물어서는 안 될 기분이었기에 물어본적도 없다.
엄마 또한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국민학교도 못 다녔다고만 했다.
지영이 언니는 꼬박꼬박 '언니'라고 명자언니를 불렀으나
가영이 언니는 뻑하면 '명자야." 라고 불렀다.
가영이 언니가 깍쟁이라고 느꼈던 것은 아마
내게 대하는 태도 때문이 아니라, 명자언니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꼬박꼬박 언니라고 부르던 지영이 언니가 어느날,
장난처럼 명자언니를 "명자야!" 불렀는데
가영이 언니에게는 그러려니 하던 명자언니가
갑자기 발끈하며 지영이 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너보다 나이 많거든!!!"
그냥 화가 아니었다. 명자언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늘 당하기만 하던 명자언니의 돌연한 태도에 나와 지영이 언니는 얼음이 되었으나
가영이 언니는 기어이 맞대응을 했다.
"별 차이도 안 나는 주제에!"
마땅한 대꾸를 못하고 부엌에 딸린 자기방문을
쿵 닫고 들어가는 명자언니 뒷모습을 보며 나는
머릿속으로 얼른 명자언니의 나이를 셈 해보았다.
지영이 언니가 그 당시 4-5학년이었으니, 명자언니는 끽해봐야 5-6학년, 아무리 올려도 중1쯤 될 터였다.
나는 명자언니를 어른으로 대해야할지, 또래처럼 대해야할지 늘 헷갈렸다.
키는 지영이 언니보다도 작은데다, 농땡이를 치는 것을 보면 또래 같은데
멸치도 슥슥 잘 볶고, 이불호청도 척척 꼬매는걸 보면 다 큰 어른 같았다.
어쩔 땐, 철 없는 짓을 해서 "언니, 이러다 아줌마한테 혼나."
라는 얘기를 내가 해줘야할 만큼 어려보이기도 했다가
또 어쩔 땐, 내가 모르는 세상을 몇백개는 알고 있는듯한 말투에
엄마보다도 더 오래 산 사람 같기도 했다.
명자언니가 가늠이 안되었던 것은 나이만이 아니었다.
어른들은 종종 내 뒷통수를 쓰다듬으며 "짱구인걸 보니 나중에 공부 잘 하겠구나." 했는데
물을 묻혀 일부러 붙인듯, 딱 달라붙은 단발 속의 언니 머리통은 너무 똥그래서
저 언니가 국민학교에 갔으면 공부를 참 잘했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이내,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거나 물색없는 핑계를 대는걸 보며,
저 언니는 어차피 학교에 갔어도 공부 진짜 못했겠네. 싶기도 했다.
명자언니는 한참 의젓하게 집안일을 하다가도
지영이 아줌마만 없으면 아무 생각없는 사람마냥 우리 사이에 끼어 놀려고 들었다.
그러다 일이 밀린 것을 들키면 또 지영이 아줌마에게 등짝을 맞게 되는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영이 아줌마는 뭐가 그리 바쁜지
하필 집에 없는 날들이 많았기에
우리가 놀고 있으면 자기도 끼어달라며 슬쩍 비집고 들어오는 경우가 흔했다.
부엌은 엉망이고, 걷다 만 빨래가 베란다에 수북한데
"니네 뭐해?"라며 스리슬쩍 자리를 잡으면
지영이 언니는 나중에 엄마한테 혼난다고 안 된다 했고
가영이 언니는 이유불문 끼워주기 싫다고 했다.
아주 가끔, 둘둘 짝을 지어 편을 먹어야하는 경우에만
언니들은 큰 선심쓰듯 놀이에 끼워줬는데
나는 명자언니와 같은 편을 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명자언니랑 편을 먹으면, 꼭 언니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날도 둘둘 편을 먹고 놀던 중이었다.
무슨 놀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명자언니가 어찌나 까르르 까르르 웃어대는지
성가시고 시끄러우면서도
그 기분을 초치면 안될듯 하여 옆에서 어색하게 따라웃었던 기억이 난다.
마루에서 넷이 한참 놀다가 갑자기 지영이 언니가
"엇! 방귀냄새!!!" 하며 코를 잡아 쥐었다.
사실 나는 아무 냄새를 못 맡았으나
가영이 언니까지 "아 진짜 냄새! 누구야!!!" 하기에
얼른 따라서 코를 쥐며 언니들을 따라했다. "누구야! 누구야!"
그래야할 것 같았다. 방귀 뀐 놈으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너도나도 아니라고, 도대체 누구냐고 시끄러워지자
지영이 언니가 갑자기, "가영이 너, 이리와봐!" 하더니
가영이 언니 엉덩이에 코를 갖다 대었다.
"어. 너는 아니네."
나는 이 원초적이고 수치스러운 수사방식이 당황스러운데다가
혹여나 내 엉덩이에서 냄새가 나서 누명을 쓰게 될까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들이대고 싶지 않지만, 대지 않으면 의심을 받을 터였다.
"명자언니 이리와봐!" 다음 순서는 명자언니었다.
명자언니는 "어우 싫어!" 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덩치가 훨씬 큰 지영이 언니 손에 잡히자 꼼짝할 수가 없었다.
기어이 명자언니 엉덩이에 코를 갖다댄 지영이 언니는
"언니네!! 명자언니가 방귀 뀌었네!!!" 하며
호들갑스레 코를 막고,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을 쳤다.
가영이 언니도 질세라, 왜 방귀를 뀌어놓고 아니라고 잡아뗐냐며 낄낄대며 놀리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옆집 언니에게 엉덩이를 들이대는 남부끄러운 자세를 취하지 않아도 된 것에
그저 다행스런 기분이었다.
사실, 방귀냄새 따위는 맡지 못했기에 범인은 상관 없었다. 나만 아니면 되었다.
명자언니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발을 동동 구르며 억을해 하다가
기어이 "우왕!" 울어버리며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덩그러니 집 안에 남겨진 우리 셋은 멀뚱멀뚱해졌다.
나는 평소 착했던 지영이 언니가 좀 낯설어져서 집에 가고만 싶었다. 다시 놀 기분이 나지 않았다.
대문을 나선 나는
혹시나 명자언니가 비상계단에 쪼그리고 있을까 하여 가보았다.
평소에도 종종, 그 곳에 쪼그리고 있는 언니를 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뒷쪽 비상계단에
역시나 조그마한 명자언니 등이 보였다.
비좁은 비상계단에 언니 옆으로 비집고 들어가 앉았더니
명자언니가 흐느끼며 말했다.
"나 아니야. 진짜 나 아니야."
뭐라고 말해줘야할지 몰라서 가만 앉아있는 내게
"쟤네 못됐어. 가끔 나한테 아무거나 뒤집어 씌워. 나 진짜 아니야."
그토록 펑펑 우는 명자언니는 처음이라, 나 또한 언니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알아. 나도 사실 방귀냄새 못 맡았어. 방귀냄새 안 났었어."
언니가 아닌거 나도 안다고 달래려고 한 말이었는데,
명자언니가 더 크게 흐느꼈다.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언니를 보며
나는 몸이 달았다. 어떻게 달랠 수 있을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늘 그랬다. 명자언니의 설움 앞에서는 우왕좌왕이었다.
나이도 사연도 모르는것 투성이의 언니었으나,
고아라는 사실만으로도 명자언니는 나에게 현실판 캔디였다.
안소니처럼 언니를 지켜줘야 한다 믿었고
애니처럼 친구가 되어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명자언니가 서러운 일을 당하거나 울음을 터뜨리면
나는 내 할 도리를 못해낸 양, 하루종일 맘이 무거웠다. 나의 캔디를 지켜내지 못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책이나 만화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없는 나이었으므로
명자언니를 기꺼이 캔디로 모시며
내 스스로 정한 그 역할을 꽤나 오랫동안 유지했다.
일곱살, 아무도 지워주지 않은 짐을 지고
남몰래 고군분투 하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